『세종실록』지리지는 1424~1432년 사이 세종의 명에 따라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고, 1454년에 이르러 『세종실록』이 편찬될 때 부록으로 간행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을별로 지방관의 등급과 인원, 연혁, 고을 경계까지의 거리, 호구, 군정의 수, 성씨, 토질과 전결(田結), 토공(土貢), 약재, 토산 등의 일정한 항목에 따라 자세히 기록되어 고려시대 보다는 훨씬 강한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조선의 특성이 잘 반영되었다.
지리지의 각 지방 토산 혹은 토공 조에는 당시 자기와 도기를 생산하던 곳을 반드시 자기소나 도기소로 구분하여 기재되어 있다. 이들 자기소와 도기소는 팔도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의 군청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으로 그 위치를 표시되고 또한 상, 중, 하품으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도자기 생산 양상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문헌사료이다. 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의 자기소가 139개, 도기소가 185개이며 따라서 모두 324개소의 자기와 도기 생산지가 있었다.
1992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진 지표조사에서 영동군 사부리에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사부리 황보·금보가마가 확인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금산군(金山郡) 토산조에서는 현 서쪽인 황금소(黃金所) 보현리(普賢里)에 중품자기소가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후 고속도로 제1호선의 확장으로 인하여 2002~2003년에 걸쳐 영동 사부리 가마터가 발굴조사 되었으며, 발굴조사에서는 분청사기가마 1기, 폐기장 2곳, 소성유구 4기가 확인되었다. 가마는 많이 훼손되어 아궁이와 번조실 일부만 확인했을 뿐 전체 규모는 알 수 없었으나, 경사진 땅을 반반하고 고르게 만든 후 축조한 지상식 단실요 구조임을 확인되었다. 또한 가마의 아궁이는 너비가 1.4~1.6m로 아래가 둥근 타원형을 이루고 두 번에 걸쳐 개축되었으며, 번조실은 현재 길이 1.6m라는 점만 확인되었다.
가마에서는 대접, 접시, 장군, 마상배, 병, 항아리, 갑발, 가마도구 등 많은 수의 분청사기와 유물이 출토되었다. 분청사기에 새겨진 문양으로는 초문, 연화문, 중권문 등의 상감기법, 국화문, 육원문 등의 인화기법, 그리고 면상감 기법의 연화문 등이 그릇에 새겨져 있었다.
특히, 정교한 인화기법의 집단연권문 안에 `山 長興庫', `山 仁壽府', `金' 등을 세긴 명문편이 수습되었다.
도자기에 새겨진 금산이라는 지명과 더불어 장흥고(長興庫), 인수부(仁壽府) 명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흥고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조달하고 관리하던 관청이며, 인수부는 정종 2년(1400) 2월에 설치한 동궁의 관아인 세자부의 이름이다. 즉 당시 관아의 이름을 그릇에 새긴 것이다.
도자기에 관아 이름을 새긴 원인으로는 태종 17년(1417)에 호조(戶曹)가 기명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방안을 올린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관아에서 그릇이 나가면 거두어들이는 일이 끝까지 안 되어 숨기거나 파괴되어 반납되는 그릇의 수가 1/5 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행태를 방지하기 위해 분납 받은 관아가 직접 책임지도록 관아에 납부하는 그릇에 각각 관아의 이름을 새김으로써, 이후 관아 이름이 있는 그릇을 사사로이 소유한 자는 관물을 훔친 죄로 다스려 막대한 폐해를 막고자 하였다.
이렇듯 영동 사부리 가마터에서는 당시의 문헌기록과 관련된 지명 및 관사명 등의 명문이 새겨진 분청사기가 출토되어 이 지역 일대에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인근 지역인 사부리 황보 가마와 함께 당시 이 일대가 중앙관청에 자기를 공납하였던 중심지역 가운데 한곳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역사시선 땅과 사람들
저작권자 © 충청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