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러시아어권 이주민 도서관을 만들자
세계 최초의 러시아어권 이주민 도서관을 만들자
  • 김태옥 충북대 러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
  • 승인 2024.11.20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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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첫 러시아 문학작품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단편 `반카'(1886)였다. 고등학교 1학년,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시사영어사에서 펴낸 영한대역 문고 `체홉 단편선'을 서점의 한 귀퉁이에서 골라 집에 오던 날, 대여섯 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 짧은 이야기를 읽고 나서 나는 며칠이나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반카'는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저녁,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에게 자신을 데려 가달라고 간절한 염원을 담은 편지를 쓰는 아홉 살 소년 반카의 이야기를 그린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할아버지의 손에 자란 반카는 구두 직공으로 팔려 시골에서 모스크바로 가게 된다. 감당하기 힘든 매질과 노동, 부족한 수면은 다정했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와 보냈던 따뜻하고 온기 가득했던 지난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한다. 주인이 잠든 틈을 타 우체통에 몰래 편지를 넣고 달려온 반카는 할아버지가 곧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 굳게 믿고 오랜만에 깊은 꿀잠에 빠진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절대로 손자를 데리러 올 수 없다는 현실에 있었다.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에게'로 되어 있는 편지의 수신처는 누구에게도 배달될 수 없는 것이었다. 평범하고 흔한 러시아인 이름 `이반'의 다른 별칭이기도 한 `반카'가 처한 영원토록 헤어나올 수 없는 불행하고 안타까운 현실, 거부할 수 없는 주인의 손찌검과 채찍, 거인과도 같은 도시, 시대의 물결 앞에 구원자를 찾지 못하며 힘겨운 호흡으로 또 내일을 살아가야 할 어린 반카의 모습이 오래도록 내게 불면의 밤을 선사해 주었다. 겨울 이맘때가 되면 모진 매질을 당해 울고 있는 반카, 고향에 있을 할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다락방의 반카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학에서는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어머니'(1906)가 날 붙들었다. 이 작품은 하층 빈민 노동자들의 무덤, 진창과도 같은 삶의 묘사로 시작된다. 이야기는 주인공 파벨의 아버지, 개 같은 인생을 살다가 개처럼 죽어간 열쇠공 블라소프의 삶을 보여준다. 16세 파벨의 인생 또한 개 같은 아버지의 인생과 다를 바 없이 음주와 폭력에 찌들다 갈 인생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변함없는 어머니의 모습 앞에 어느 날부터 책을 가까이하게 되고 변화된 삶을 살기 시작한다. 파벨은 책을 통해 빈민 노동자들의 삶을 바꾸는 진정한 혁명가로 성장한다.

청소년기 읽었던 체호프의 단편들과 대학생이 되어 읽었던 고리키와 레르몬토프, 톨스토이와 파스테르나크의 작품들은 나의 삶, 나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소비에트와 러시아 국가를 작사한 세르게이 미할코프는 `책 없이 우리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시에서 `고요한 돈강', `돈 키호테'와 같은 위대한 소설들처럼 책은 모든 세기에 걸쳐 모든 나라를 관통해 가리라.'라고 말한다. 앞서 등장했던 체호프는 `갤러리로 향하는 각각의 모든 그림, 도서관 장서로 향하는 진실의 책 하나하나는, 그것들이 비록 아무리 적다 하더라도 국가에 부를 축적하는 위대한 대의에 큰 몫을 한다.'라고 했다.

청주에 거주하는 러시아어권에서 이주한 많은 청소년이 책 한 권 읽지 않고 사회로 진출하고 있다. 한국어와 러시아어, 한국문화와 러시아문화를 아우르는 강자가 되어야 하는 이들이지만, 한국어도 러시아어도, 한국문학과 러시아문학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내세울 것 없는 우리의 이웃이 되어간다.

러시아어 장서와 한국문학 장서가 절반이 되는 큰 도서관을 만들자. 청주와 충북에 들어설 그런 도서관은 세계 최초의 도서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어와 문학을 통해 이들 청소년과 주변의 러시아어권 성인들을 우리 사회로 동화시키는 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유라시아와 대한민국을 잇는 중추 역할을 앞으로 들어설 청주와 충북의 이 도서관이 될 수 있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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