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는데 중년쯤 돼 보이는 남자가 우유를 내밀면서 드셔보라고 한다. 판촉 사원인 듯, 같은 우유 회사의 로고가 있는 캐리어를 밀고 있었다. 종이 팩이 아닌 병에 든 우유가 새로워서 얼른 받아 들고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데 우유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2~3분 사이에 감사의 마음은 의심의 마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왜 지하 주차장에서 판촉을 하지? 판촉 사원답지 않은 저 불량한 옷차림은 뭐지?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손에 든 우유병이 몹시 께름직했다. 모르는 사람이 준 음료는 함부로 마시지 말라는 말도 생각나고 우유 속에 마약이나 독극물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쾌한 추측도 떠올랐다.
판촉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남은 우유를 건넸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곤해 보이는 내 얼굴을 보고 캐리어에 있는 우유가 생각나 꺼내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마약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의심에 사로잡힌 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우유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선배는 모르는 택배가 와 있어서 당황스러웠던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택배가 문 앞에 와 있는데 열어보면 안 될 것 같은 께름직한 기분이 들어 도저히 열어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온 것이기에 어쩌지도 못하고 멀찍이 밀어 놓은 채 문을 닫아버렸단다. 후에 택배의 출처는 알게 되었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세상을 얼마나 불신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오는 이상야릇한 문자와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때문에 전화기를 열어보는 것이 간혹 겁이 난다. 이런 문자와 카톡이 초등학교 1학년인 손녀딸의 전화기에도 수시로 오고 있으니 염려스럽기만 하다.
얼마 전에는 주문하신 꽃이 배달되었다는 문자와 함께 꽃바구니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주문한 적도 없는 꽃바구니가 왔다니 이게 무슨 일? 순간 버튼 하나만 누르면 돈이 줄줄 빠져나간다는 보이스피싱 문자를 잘못 누른 것 같은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남아있는 볼일을 미루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보니 화사한 꽃바구니가 하나가 속없이 문 앞에서 웃고 있었다. 생일인 친구로 카톡에 내 이름이 뜨기에 그동안 무심했던 게 생각난 지인이 보낸 생일선물이라고 했다. 음력 생일을 쇠기에 생일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던 차에 온 꽃바구니라 의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먹고살기 바빴던 시절에는 없었던 범죄가 속출하고 있다.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사건이 속속 보도되다 보니 사람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선한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조차 일단은 의심부터 하게 되고, 쓸데없는 의심이 부담스러워 요구하지 않은 친절은 자제하게 된다.
시청각 장애인으로 최초의 인문계 학사를 받은 헬렌 켈러는 말했다. “믿음은 산산조각난 세상을 빛으로 나오게 하는 힘이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그녀에게야 말로 세상은 믿기엔 너무 위험한 지뢰밭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믿음은 빛으로 나오게 하는 힘이라며 믿음의 편을 들어주었다. 믿음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힘이다. 믿음이 깨지면 그 힘은 낱낱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 갖가지 사건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편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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