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사과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24.10.2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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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오랫만에 도심을 벗어나 혼자서 시골길을 걸었다. 어디쯤에선가 과수원을 지나다 보니 가을빛을 받아 사과가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었다.

지난 봄 때늦은 추위에 아랑곳없이 활짝 핀 꽃이 손톱만 한 열매를 맺더니 긴 긴 여름날의 뙤약볕아래 큼직하게 자라 얼마전까지의 연초록색에서 빠알갛게 변해진 것이 무척 예뻤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어린 시절의 철없던 짓이 생각난다. 오랜 세월동안 누군가 알세라 마음 깊이 꼭꼭 숨겨놓고 살아온 것이 얼마만인가. 내고향 흐르늪에서 남의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 사과를 따먹은 이야기다.

막바지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팔월 하순이었다. 누에를 치는 우리집 뽕나무밭이 과수원 옆이어서 뽕잎을 따러 갈 때면 과수원 나무에 열려있는 사과가 얼마나 먹음직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침이 입안에 가득 고이곤 했었다. 그러나 주머니에 돈 한푼 없는 나로서는 감히 과수원 주인에게 사과를 사먹는 것은 꿈에도 그리지 못할 일이었다.

“아, 저 사과 한번 먹어 봤으면.”

몇날 며칠을 애만 끓이던 어느날 앞집 친구와 그의 동생에게 내가 맛있는 사과를 실컷 먹게 해주겠다고 말하니 기다렸다는듯 정말이냐면서 당장 가자고 말했다. 의기투합한 세사람은 곧 집에 가 뽕잎따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광주리를 옆에 끼고 우리 뽕나무밭옆 과수원으로 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혹시 다른 사람이 과수원에 들어가 사과따는 것을 볼까 두려워 사방을 휘 둘러보고 나서 평소 보아둔 아카시아 나무로 된 울타리중 한곳으로 들어가 준비해간 광주리에 사과를 가득 따서 담고 나와 걸음아 날 살려라 강가로 내달렸다. 그 강은 남한강으로 과수원에서 2km쯤 떨어진 곳이다.

나와 친구 형제는 자갈밭위에 광주리를 내려놓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사과를 정신없이 먹고 또 먹어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볼룩해진 배에, 끄윽 소리가 입에서 나오고서야 광주리를 보니 얼마나 사과를 많이 땄는지 남은 사과가 셀 수 없이 남아 있었다. 사과를 깨물어 먹을적마다 입안가득 찼던 달콤하고 맛있는, 무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최고의 쾌감으로 그동안의 욕망을 채우고 난 후 소리내어 흐르는 여울물 소리도 아랑곳없이 벌렁 드러누워 한잠 자고 나니 어느덧 해가 저만치 아래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남은 사과를 어떻게 하나. 그리고 집에 가서는 부모님이 뽕잎은 하나도 따오지 않았으면서 여지껏 어디 가 무얼 하다 오느냐고 물으시면 어떻게 말할 것인지 두려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참동안 머리를 짜낸 끝에 사과는 땅을 파고 묻은 후 가끔씩 와서 꺼내 먹기로 하고 일어섰다. 다행스럽게 집에서는 어머니가 어디 갔다가 저녁 늦게서야 빈 광주리로 돌아왔느냐는 꾸중섞인 말씀이 있었을 뿐 그 이상의 일은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날 부터였다. 뽕잎따러 어제의 과수원옆을 지날 무렵부터 도둑이 제발 저린 듯 온 몸이 떨리면서 땀이 나는 거였다. 과수원 주인이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잘못을 크게 저질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과수원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다니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은 물론 불안감으로 밤마다 잠을 자지 못해 어디 한군데 없이 마음이 뒤숭숭했다.

아버지가 “인영이가 몸이 어디 아픈지 얼굴에 힘이 없어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몹시 먹고 싶어 안달이었던 사과를 먹은 행복은 일시적이었을 뿐 그 죄책감은 그해 가을이 가고 나서도 오래도록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해가 몇번 바뀌고 나서야 차차 마음의 안정을 찾기는 했지만 온 몸에 살이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은 여전했다. 그날 이후로 절실하게 얻은 교훈이 절대 남의 것을 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뒤늦게나마 염치없는 소리겠지만 과수원 주인에게 진 죄를 고백하면서 용서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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