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기다렸던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은 해가 서쪽 산으로 넘어간 후에나 시나브로 온다. 워낙 뜨겁고 무더운 지난 여름이었던지라 어여 어여 가길 바라던 여름이었다. 그럼에도 여름 끝자락에 들어서니 가는 여름의 시간을 살짝 잡고 싶어졌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세월이 아쉬워 드는 마음이리라! 하여 오래간만에 해 봤다.
지나가는 여름을 잠시 손톱에 잡아두려 봉숭아 꽃물 들이기를 했다. 여름의 막바지에 들어설 무렵이면, 뜨거웠던 여름을 한겨울까지 어떻게든 잡아보려 내 어릴 적, 내 아이들 어릴 적 했던 행사를 예순을 방금 넘긴 지금 다시 했다.
우리네와 함께 긴 여름을 힘겹게 보냈을 봉숭아꽃! 깨 빻는 작은 절구에 엷은 분홍색의 꽃송이를 소복이 쌓아놓고 거기에 이파리와 백반을 양념 삼아 섞어가며 나무 절굿공이로 살살 짓이기니 상큼하면서 시금털털한 향을 내며 붉은 물이 배어나온다. 그 꽃 덩이를 한 꼬집 잡아 내 손톱 위에 정성스레 올려 비닐로 싸매고 있자니 서른 넘은 작은 아들이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너두 해볼텨?”하니 못이기는 척하며 오른손 약지를 슬며시 내놓는다. 그렇게 작은아들과 나는 지난여름을 손톱에 잡아넣었다.
손톱에 스며든 꽃물! 내게는 세월로 남았으나 엄마로 스며든 이가 있다. 내 엄지와 검지 손톱에 물든 꽃물이 손톱반달과 등을 맞대고 있을 무렵 “봉숭아 물들이셨네요?”라는 그림책 동아리 선생님의 이야기! 미소는 지었으나 우수에 젖은, 질문을 한 듯하나 대답은 기다리지 않는 자분자분하게 연이어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들고 선생님의 얼굴을 넘겨다 봤다. 시선은 내 손에 와 닿아 있으나 마음은 멀리 가 있다. 엄마와 함께 손톱에 물들이던 그 시절로 가 있는 듯하다.
마음에 그려진다. 어린 딸과 머리 맞대고 앉아 짓이긴 봉숭아꽃을 손톱에 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광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우리 딸 손톱에는 미래를 담아 넣고 엄마 손톱에는 추억을 붙잡아 넣고…' 노래 부르듯 운율을 얹어 말했던 그녀의 엄마는 그 마음을 시로 남기셨다.
`… 남편의 엄지손톱에 추억을 심어 놓고, 딸아이 예쁜 손톱에 꿈을 심어 놓고, 아들아이 솥뚜껑 같은 손톱에 희망을 붙잡아 놓고, 갈퀴 같은 이내 손톱엔 사랑을 찍어 놓고 …'-<고향에 가고 싶다/시인 오문재/예술의숲> 중 `봉숭아'- 몸의 아픔으로 종국에는 마음마저 아프셨다던 그녀의 엄마는 `이 한밤 모두의 손톱에 무지갯빛으로 기도해본다.'는 시의 한 구절처럼 가족들에 대한 기도를 남기고 수년 전 멀리 가셨단다.
봉숭아꽃을 보며 이별과 사랑을 읽어낸 이가 또 있다.
`… 내가 너의 마음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네 혼에 불을 놓는 꽃잎일 수 있다면 나는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거다. …'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이해인/분도출판사>중 `봉숭아'-
봉숭아를 볼 때면 엄마 생각이 난다는 이해인 수녀님은 봉숭아 물이 손톱에 스며들 듯 사랑으로 물이 들면 `이별조차 간절한 기도'라고 봉숭아가 넌지시 건네는 고백을 들으셨단다. 그만큼 사랑으로 그득하셨기에 그리 들으셨으리라. 냉동실에 얼어 있는 봉숭아꽃! 첫눈 내릴 즈음 꺼내 지난 뜨거웠던 여름을 품은 봉숭아가 건네는 사랑의 말, 봉숭아에 깃든 기도를 다시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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