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땅콩을 참 좋아한다. 조치원 재래시장에서 늘 볶음 땅콩을 사다 놓고 주전부리로 한 주먹씩 먹는다.
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담배는 지금껏 한 모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과자나 다른 주전부리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다. 오죽하면 주변 사람들이 “무슨 낙으로 사는 겨?”라는 핀잔을 주기도 한다.
몇 해 전 일이다. 퇴근 후 물 한 잔 마시러 주방을 들어섰는데 햇땅콩이 눈에 보였다. 얼마나 토실토실하고 반지르~ 한지…, 얼른 한 알을 까서 입에 넣었다. 정말 고소한 냄새와 함께 부드럽게 입안에서 부서진다. 호호호 살짝 흥분해서 한 알을 더 집었다. 그 순간!
“그거 아들 거야~, 그걸 왜 먹어~, 그건 국산 햇땅콩이란 말이야. 당신 건 싱크대 안에 있잖아~”
마치 뭘 훔쳐먹다 들킨 양 화들짝 놀란 나는 겁결에 땅콩을 삼켜버렸다. 아내의 호통에 놀라 싱크대를 열어보니 삐쩍 마른 중국산 땅콩이 봉지에 꽉 차 가지런하다.
뭐… 아들 먹을 땅콩에 손을 댔으니, 참 내…, 그냥 `모성 본능'이란 단어를 혼자 내뱉으며 마른 중국산 땅콩을 껍질째 우걱우걱 씹어먹는다.
이런 웃픈 에피소드를 우연히 떠든 일이 있다. 학교 행정실에서 모성본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다 마침 주제에 딱 어울리는 스토리라 생각해 나의 억울함을 맘껏 표현했다.
평소 화통한 성격으로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행정부장님이 나의 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반응한다.
“교감선생님 내가 조그만 밭이 있는데 우리 집 식구들은 아무도 땅콩 안 먹거든요? 내가 올해 밭 한 고랑이 통째로 땅콩 농사지어서, 우리 교감선생님 햇땅콩 잔뜩 해드릴게. 알았죠?” 호호호.
그냥 그 자리에서 분위기상 농담삼아 떠든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몇 주가 지난 후, 점심시간에 급식소에서 부장님이 살짝 흥분하신다.
“교감선생님 지난 주말에 내가 밭에다 땅콩 잔뜩 심었거든요? 기다리셔요~, 진짜 맛있는 땅콩 해드릴게. 우리 집 식구들이 그러더라구요? 아무도 땅콩 안 먹는데 웬 땅콩을 그리 많이 심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우리 교감선생님 드릴거라구”.
와~ 우리 부장님 스킬이 이 정도랍니다. 그 뒤로 가끔 땅콩이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주기적으로 듣다가, 얼마 전 정기 인사이동으로 시내 근처 학교로 전출을 가셨답니다. 가시면서도 “교감선생님~ 땅콩은 아무 걱정 하지 마셔요~~” 호호호. 참 살가운 분이다.
그런데 며칠 전 일이다. 행정실에 내려갔는데, 실무사님이 나를 보더니,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시다.
“교감선생님~ 어제 예전 근무하셨던 김 부장님이 잠깐 다녀가셨는데, 두더지가 땅콩밭은 다 뒤집어놔서 올해 교감선생님 드릴 땅콩 농사 망했대요~.”
“네? 그걸 어쩌나? 두더지가 밭을 헤집었다는 건 땅이 좋다는 건데… 그건 그거고 땅콩 농사 망해서 우리 부장님 어쩌지? 땅콩이야 사 먹으면 되지만…, 일년 동안 한결같이 땅콩 타령? 하면서 지냈는데 그 마음은 또 어쩌냐?” 이거 큰일 났다 싶은 생각에 나도 그 자리에서 한동안 얼어붙었다. 얼마나 속상했을까….
꼭 누구한테 잘 보이려는 것도 아녔고, 지인이 마냥 좋아한다는 먹거리를 내 밭에 심고, 쑥쑥 자라는 작물들을 보며 얼마나 행복한 상상을 했을까….
부장님 마음을 생각하니 내가 다 속이 까매진다. 솔직히 나도 좀 아깝긴 하다. 허허 부장님 덕에 어떤 두더지만 포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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