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청일전쟁은 각각 16세기와 19세기 말에 조선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가지 중요한 전쟁으로 각 전쟁에서는 외국 세력의 소속하에 조선군이 서로 싸우는 상황이 발생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의 판도를 바꾼 평양성 전투는 1592년 6월 평양성이 함락된 때부터 명군과의 협공으로 평양성을 탈환할 때까지 평양에서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벌어졌던 네 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1593년 1월의 전투만을 뜻하기도 한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 소속의 조선군과 왜군 소속의 조선군이 충돌하게 되었다.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임진왜란의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고니시의 부대가 먼저 한성으로 후퇴하였고 이어서 함경도쪽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대도 한성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행주산성에서의 분투 등에 힘입어 결국 일본군은 한성에서도 철수하여 경상도 지역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전세를 바꾼 결정적 요인이 명나라 대군의 참전에 있었던 때문에 이후 전쟁의 판도는 명과 일본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명-일 양국은 강화협상에 주력하였으며 조선은 이 협상에서 사실상 소외된 채 지루한 국지전을 감내해야만 했다.
청일전쟁은 1894~1895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일본은 청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조선의 내정개혁을 명분으로 1894년 7월 경복궁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도발을 시작했다. 이어서 황해와 평양 등에서 벌어진 본격적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중국 본토를 공격하여 점령해 들어갔다. 청국은 강화회담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열강의 간섭을 우려한 일본도 이에 응해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전쟁이 마무리됐다. 이 조약으로 청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한반도는 사실상 일본의 지배에 들어갔다.
청일전쟁 동안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터가 되었다. 조선군 일부는 청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섰고 다른 일부는 일본군에 협력하거나 강제로 일본군에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 소속 조선군과 일본 소속 조선군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임진왜란과 청일전쟁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외세의 간섭과 내적인 불안정성이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한 대표적 사례로 유엔군을 비롯해 중국과 소련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쟁이다.
최근 미중갈등이 격화하면서 한반도가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중국이 하나의 중국이라는 기치아래 무력을 통한 통일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중국의 대만침공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미국이 대만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 개입을 하게 되면 중국은 미국의 동맹국들 특히 한국과 일본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수 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군사적 준비태세를 강화하고 국방력을 현대화하여 가능한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 또한 한미동맹강화를 비롯해 국제 사회와 협력하여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덧붙여 전문가들이 주문하는 것은 좋든 싫든, 어떠한 형태라도 남북간 대화창구복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세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족의 가슴에 칼을 겨누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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