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 2월에 들어 있는 절기인 입춘(立春), 우수(雨水) 다 지났으니 겨울도 어느새 끝자락에 다다랐다.
성급한 사람들은 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아직은 엄연한 겨울이다. 봄이기도 하고 겨울이기도 한 이 시기에 피는 꽃이 매화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핀 꽃이기에 강인할 거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매화의 꽃잎은 다른 꽃들에 비해서도 여리여리하기가 그지없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의 꽃인 셈이다.
그래서 매화는 옛부터 강한 정신력을 강조하는 선비들이 애호하는 꽃이었다.
조선(朝鮮)의 시인 이황(李滉)은 매화의 매력에 푹 빠져 살다 간 인물 중 하나였다.
달밤의 매화(陶山月夜詠梅)
獨依山窓夜色寒(독의산창야색한) 홀로 산창에 기대 서니 밤 빛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매초월상정단단) 매화 가지 끝에 달 떠올라 둥글구나
不須更喚微風至(불수경환미풍지)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은 불어오니
自有淸香滿院間(자유청향만원간) 저절로 맑은 향기 있더니 뜰 안에 가득 차네
가을 국화는 술과 잘 어울리고 초봄 매화는 달과 합이 잘 맞는다는 말이 있다.
시인은 산속에 있는 자신의 거소에서 초봄의 달밤을 맞이하였다. 방 밖으로 나와 창에 기대선 채였다. 밤의 기운은 여전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창에 기대 서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초봄에 관상할 수 있는 빼어난 풍광이 곧 펼쳐지리라는 기대감이 바로 그것이다.
꽃이 핀 매화나무 가지 끝에 달이 걸린 장면은 시인이 가장 즐기는 인생 풍광이었으리라.
매화꽃은 이미 대기하고 있었고 달만 도착하면 되는 긴장된 상황이었는데, 드디어 둥근 달이 꽃 달린 매화나무 가지 끝에 당도하였다.
이 황홀한 순간을 더욱 짜릿하게 만들어 준 찬조 출연도 이미 계획돼 있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온 산들바람과 뜰 안을 가득 채운 맑은 향기는 매화 가지 끝에 걸린 달을 보는 것만으로도 넋을 잃은 시인을 황홀경으로 밀어 넣은 결정타가 되었다.
겨울 한복판에 있을 때는 이 시기가 마냥 지나가지 않을 것 같지만, 시간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것은 아무도 없다.
차가운 눈을 뒤집어쓰고 피어 있는 설중매는 겨울을 배웅하는 하나의 예우이다. 이 시기에 꽃 핀 매화 가지 끝에 걸린 둥근 달을 보기 위해 기꺼이 차가운 밤 공기를 견디는 사람은 삶의 멋을 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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