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오월인데
창밖은 오월인데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0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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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밤샘 노동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와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 <아침의 피아노>를 읽는 일은 처연하다.

「아침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린다. 가지 끝 작은 잎들까지 조용하게 기쁘게 흔들린다. 흔들림들 사이로 빛들이 흩어져서 반짝인다.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혼자서 둘이서 걸어간다. 노란 가방을 멘 아이도 종종걸음으로 걸어간다. 모두들 가로수 잎들처럼 흔들린다. 그들의 어깨 위에서 흩어진 빛들이 강 위의 파동처럼 반짝인다. 고요함과 기쁨으로 가득해서 엄숙한 세상을 바라본다. 그 한가운데 지금 나는 있다.」

살기 위해, 더 좋은 세상을 함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한사람의 노동자가 오월 첫날 노동절에 분신했다. 그리고 사경을 헤매던 그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생명을 잃었다. 살면서 그는 아침바람에만 흔들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바람은 빈 곳을 채우는 공기의 흐름이다. 때론 차갑고 거세게 몰아치는 삭풍이고, 어느 때는 노동에 지친 육신을 깨우는 서늘한 아침이며, 고된 땀을 식혀주는 청량한 기운이 되기도 한다.

끝내 생명을 잃은 그를 흔든 것은 인간이 만든 바람이다. `업무방해와 공갈'로 위협하는 권력과 `정당한 노조활동' 사이의 기압의 엄청난 차이에 노동자의 자존심과 생명의 존엄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고, 다시 반세기를 거슬러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는 퇴보를 예감하는 현실이 비통하다.

살아가는 일이 흐르는 강물처럼 유려하기만 하다면 오월의 바람이 다소 거칠다고 어찌 두려울 수 있겠는가. 모진 겨울을 견디며 마침내 싹을 틔우고, 일찌감치 꽃들을 세상으로 보내며 진하고 두터워지기를 기다렸던 봄은 5월이 되면서 단단해 지는데, 현대의 한국에서 우리는 4월에, 그리고 5월에 너무도 많은 생명을 잃었다. 그런 5월이 창밖에 선연하다.

흘러간 강물은 되돌릴 수 없다. 빼앗기고 잃어버린 생명 또한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다만 그곳에 어떤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때 거기 흐르던 강물이 맑았는지, 아름다웠는지. 혹은 평화롭고 풍요로웠는지. 그리고 그 강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음했고, 피를 흘렸으며 압박에 시달렸으며,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지를 기억하는 일은 오롯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역사는 그런 것이고, 우리는 모순의 시대로 되돌리고 있는 권력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제 몸에 불을 붙여 `자존심'을 모질게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노동자 한사람이 생명이 우주에서 사라졌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을 말하는 일이 힘겹고 어렵다. 김진영이 암세포와 사투를 벌이면서 끝까지 놓지 않았던 글쓰기는 <아침의 피아노>라는 서정으로 남는다.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로 세상에 다짐하는 철학자의 병사(病死)와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유서를 남기고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진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아까운 순간// 라일락 향기 짙어가는데/ 너는 아직 모르나 보다/ 잎사귀 모양이 심장인 것을// 크리스탈 같은 美라 하지만/ 정열보다 높은 기쁨이라 하지만/ 수학은 아무래도 수녀원장// 가시에도 장미 피어나는데/ `컴퓨터'는 미소가 없다./ 마리도 너도 고행의 딸.」<피천득. 창밖은 오월인데> `미적분을 푸는 일'과 `그림 그리기'의 가치가 서로 다를 수 없고, 달리 대접받을 일도 아니다. 미적분의 능력이 그림 그리는 일의 우아함을 억누를 수 없듯이 권력의 힘에 따라 함부로 바람을 만들어 세상을 흔들려는 시도 또한 `삶'과 `죽음'을 절대로 초월할 수 없다.

창밖은 사람의 심장을 닮은 라일락 잎새 짙푸른 어느새 5월인데, 함부로 부는 바람이 어지럽다.

언제쯤 핏빛 말끔하게 지워진 푸른 5월을 만끽할 수 있겠는가. 창밖은 5월인데, 오월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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