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들녘에 조팝나무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잠깐의 봄날, 사람들을 홀리게 했던 벚꽃이 꽃비가 되어 서둘러 떠난 서러움을 대신해 솜사탕처럼 하얀 꽃 무더기가 봄 햇살을 더 눈부시게 합니다.
조팝나무를 쌀나무로 부르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얼마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소비만능의 시대에 쌀이 없어 배를 곯던 쓰라린 기억은 돌이킬 필요가 없다는 오만이 넘쳐나기 때문이겠지요.
발전과 성장만을 끊임없이 독려하고 강요했던 개발독재의 시퍼런 서슬은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당연한 듯 체화되었고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생명을 위협받을 만큼의 굶주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들녘에 흐드러진 하얀 조팝나무꽃이 하필이면 지난 겨우내 간신히 연명했던 쌀이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채 여물지도 못한 보릿고개에 지천으로 피는 것은 서러움이었습니다. 쌀알만 한 꽃잎이 후두둑 땅에 떨어진 모습을 볼 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쌀밥 한 그릇은 얼마나 사무치는 간절함이었겠습니까.
대통령이 국회가 통과시킨 `양곡관리법 일부 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이 개정안은 쌀이 수요의 3~5% 이상 초과 생산되거나 쌀값이 전년도보다 5~8% 이상 하락할 경우 정부가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이 과정도 예상한대로 `시장경제'의 논리가 거론되었고, 예외 없이 `포퓰리즘'이라는 비난도 등장되었습니다. 대화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여당 주도의 법안에 대한 반정치적 사고방식은 이번에도 적나라합니다.
쌀의 과잉생산과 쌀 소비 감소의 현상에 대한 시시비비를 `수요단상'을 통해 통렬하게 가리는 일은 어설플 것입니다.
다만 쌀농사를 포기하거나, 대체작물로 온통 전화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식량주권'과 `기후변화'에 따라 언젠가는 닥쳐올 `위기'는 충분히 고려된 판단인지는 반드시 따져 볼 일임은 분명합니다.
극심한 수해 현장을 취재하던 시절, 쌀농사를 위한 우리나라의 논이 안동댐 3개 정도의 저수능력을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확인하면서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후 논 면적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으며,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재앙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고. 농촌은 심각하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기(史記)에는 `임금은 백성이 하늘이고, 백성은 밥이 하늘(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이라고 했습니다. 굶어 죽는 이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세태가 `밥이 하늘'임을 납득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빵과 고기가 지천인 세상은 `심심(深甚)한 사과'를 `심심하게' 받아들이는 것만큼 의식이 실종되고 있습니다.
`쌀'은, 그리고 `밥'은 과잉생산에 대한 걱정과 가격 안정에 대한 불안에 매몰될 수 있는 시장경제의 틀에 갇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논리대로 `먹는 일'은 경제 단위로 치환할 수 있는 `소유'의 개념에 속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양식'에 해당하는 것이 `쌀'이고 `밥'입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것.'-김지하 시, <밥은 하늘입니다>.
`생명'을 최대의 화두로 삼았던 김지하 시인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쌀'은 푸대접의 모멸에 점점 더 깊숙하게 추락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단위 수확이 많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경작되고 있는 고유 품종인 `신동진 벼'에 대한 단종을 정부가 추진하고 있다는 끔찍한 소식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쌀'이 홀대되면 사람에게 `존재'도, 나눔도 공동체 의식도 희미해질 것입니다. 비오는 봄날 아침. 그래도 농부들은 쌀농사를 준비합니다. 그 하늘같은 마음이 있어 우리는 여태 4월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