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탁사 최병헌 목사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탁사 최병헌 목사
  • 김명철 제천교육장
  • 승인 2023.04.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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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제천교육장
김명철 제천교육장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애국가의 작곡가는 안익태 선생으로 알고 있으나 작사가는 누군지 모른다. 지금까지는 작사자로 윤치호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이 거론되고 있었다. 하지만 학계나 역사적으로 공인된 사실은 아니다.

1955년에 주한 미국대사관이 당시 우리나라 문교부에 `애국가'의 작사자 관련 자료 요청으로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증거 부족으로 작사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애국가의 작사가일 가능성이 충북 제천 출신의 개화 사상가이자 개신교 목사였던 탁사 최병헌 선생이 거론이 되고 있다,

최병헌은 1858년(철종 9년) 1월 16일 충북 제천시 신월동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탁사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영환지략'(瀛環志略) 등의 서양 서적을 읽고 서양문화의 발달상을 알게 되고, 그 정신적 바탕에 기독교가 있음을 알고 기독교인이 되어 개화운동가와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조선의 낙후된 현실 앞에 사회개혁운동에 관심을 두던 중 선교사 존스(Jon es, G·H)의 우리말 선생이 되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배재학당의 한문교사가 되면서 35세에 세례를 받고 서울의 정동교회와 제천 제일교회 등지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그는 문필가로서도 활동을 하며 개화사상 및 정치개혁사상을 역설하였는데, 성서번역위원과 독립협회 간부, 제국신문 주필 등으로 활약했다.

특히 민족언론인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에 기고를 통해 민족의식과 근대 개화사상 고취에도 노력하였다.

1902년 44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이듬해 정동교회의 창설자인 아펜젤러(Appenzeller, H·G)가 해난사고로 순교하자 정동교회 담임 목사로 1903년부터 1914년까지 시무하였다. YMCA운동에도 참여, 종교부위원장 및 전국 삼년대회의 대회장으로 활약하며 민족 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은퇴 후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사망할 때까지 비교종교론과 동양사상을 강의했다. 해박한 한학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동양의 여러 종교를 교육했다. 한국의 상황과 전통 속에서 기독교의 의미와 위치를 밝히려고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미 개항기 전반기부터 한역서학서 탐독을 통하여 서구문명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으며, 서양의 종교가 서양문명의 뿌리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특히 최병헌은 종교와 정치의 상관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면에는 기독교를 통한 구국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주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애국가는 윤치호 선생과 최병헌 목사의 공동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여러 가지 사료를 분석한 결과 애국가는 최병헌 목사가 정동교회 재임 시절인 1905년께 교회 목사관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지은 `불변가'에 윤치호 선생의 `황실가'를 후렴으로 넣어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단설교자로 민족구원의 사명을 품은 최병헌 목사는 의병의 고장 제천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신앙인이며, 민족 지도자였다. 서양과 동양을 대립적인 관계에서 서양을 침략 세력만 보지 않고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통해 민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선각자이며 지도자였다. 의병 정신이 살아 있는 제천 출신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가'를 작사하여 민족정신과 자긍심을 고취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탁사 최병헌 목사를 비롯하여 우리 지역의 숨겨진 인물을 더 많이 찾아서 발굴하고 홍보하여 다음 세대들의 귀감으로 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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