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貪) 게 없다면 화내지(瞋) 않는다. 법치를 내세울 때 사람은 공정하고 상식적이길 바란다. 그런데 법치를 내세우고 불공정한 독재정치를 하면 화가 난다. 만약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법치를 주장하는 인간에게 바라는 게 없다면 불공평하건 말건, 독재를 하든 말든 화낼 필요가 없다. 국민의 자존심을 살려줄 걸 바라며 외교 권한을 위임했는데 국가 자존심을 깔아뭉개며 굴종적으로 외교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변변한 역사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해 최소한의 역사의식이 없는 놈들이 무얼 하나 제대로 해낼 게 있겠어?'라고 체념하면 화도 나지 않는다.
바라면 화를 내게 되니 바라지 않고 눈을 감고 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임시방편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살려면 임시방편만으로 만수무강이 어렵다. 곳곳에 사고를 처질러 놔서 눈을 감고 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곧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철학적(근본적) 반성을 강요한다. 근본적인 반성을 하지 않으면 분통이 터져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라는(貪) 건 대상에 욕심을 내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성에 대한 사랑, 음식을 먹고자 하는 마음, 직위를 바라는 마음,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마음 등이 탐이다. 이런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화(瞋)가 난다. 진(瞋)이란 사람이나 대상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그에 대해 화를 내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탐은 대상을 향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이고 진(瞋)은 부정적인 마음이며 부정은 긍정에 뒤따라 나오는 마음이다. 그래서 탐이 진보다 더 근본적이다. 따라서 분통이 터져 죽지 않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방안은 탐을 없애는 것이다. 곧 탐을 없애야 평정심을 유지하고 살 수 있다.
탐진치(貪瞋痴)를 삼독(三毒)이라 한다. 곧 탐은 독(毒)이다. 왜 독이라고 할까? 탐한다는 건 바라고 욕구한다는 것이고 바라고 욕구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먹고 싶다는 건 음식이라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목이 마르다는 건 마실 것을 대상으로 한다. 대상을 원하고 바라기 위해서는 바라고 원하는 내가 있어야 한다. 곧 나와 대상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비로소 탐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 관계에서 나와 대상의 관계가 잘 정리되면 즐거운 마음이 생기고 삐걱거리면 괴로운 마음이 생긴다. 이도 저도 아니면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긴다. 즐거운 느낌이 현실화되면 탐(貪)이 되고 괴로운 느낌이 현실화되면 화가 생긴다(瞋). 그리고 화는 즐거운 느낌이 부정됨으로써 생겨난다.
탐이 독인 것은 원래 있지 않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곧 나-대상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탐이 생기는데, 원래 나도 없고 대상도 없다. 원래 없는 것이 결합됨으로써 출현하는 게 탐하는 마음이니 그건 허구적인 것이다. 곧 모든 탐하는 마음, 곧 욕구는 헛물이다. 없는 게 없는 걸 바라니 당연히 바라는 마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걸 채우려 하니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항상 채워지지 않으니 계속 채우길 원하고 그럴수록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갈증만 커질 뿐이다. 내가 싼 똥을 내가 먹는 꼴이다. 대상은 없는 내가 있어야 나타나는데 없는 내가 만들어낸 대상(똥)을 바라니 내가 만들어낸 똥을 내가 먹는 거라고 한다. 없는 자가 없는 대상을 바라는 헛물이 욕구이고 이 욕구는 계속 자라서 사망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독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허망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연인관계도 허망하고, 부부관계도 허망하고, 부모 자식의 관계도 허망하다. 모든 걸 허망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면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