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살아있는 역사의 기록으로써 천 마디의 말이나 글보다 역사 그대로를 전할 수 있다는 기록성에 있습니다.”
사진가 송진화. 그는 사진이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후대에 남긴다는 것에 중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대전에서 2남1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8세 되던 해에 장난감 같은 카메라로 처음 사진을 시작한 그는 취미로 촬영, 현상, 인화를 직접 했다.
당시는 일제에서 광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누구에게 사진예술은 고사하고 찍고 만드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자신이 어설프게 해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사진가 현일영과 만나 사진예술에 관해 의견을 나누면서 차츰 사진가의 눈을 뜨기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6·25 후 광주로 내려온 그는 군 관계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 찍는 묘미를 느꼈고 사진은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알아가고 했다. 그때는 반군, 반민이라 하여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의 사진가로, 찍은 사진은 모두 군에 주는 식이었다.
1960년이 지나면서 그런대로 사진가로서의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그는 5·16군사정부의 예술단체통합에 따라 사진협회를 창립하고 광주의 사진 발전에 적극 나섰다. 초대 지부장이 취임도 않고 유명무실해진 협회에 2대 지부장으로 취임한 그는 서울의 사진단체들과 적극 교류를 펼치면서 사진예술의 시야 확장에 나섰다.
회원은 10여명에 불과했으나 그 열정만큼은 대단하여 전시 때마다 대작으로 일반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사진예술작품을 이루어내는 연구와 작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가 사진가로서의 긍지를 느낄 작품을 발표했다. 1964년에 내놓은 `농촌의 아침'이다. 안개 낀 아침에 제방을 걸어오는 노인을 찍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사진가 송진화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카메라를 들고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대로 필름에 담았다. 농촌의 때묻지 않은 산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고 만나 순박한 인심, 넉넉한 심성을 침착하게 찍어 돌아오면 밤새워 현상하고 인화하길 수 세월동안 이어갔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당대의 삶의 모습들이 보존되고 훗날 그것이 보여졌을 때 사진가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사진가는 리얼한 현장감을 느껴 인식하고, 폭넓은 표현기법으로 진한 감동을 주는 사진을 찍고 만들어 이루어내야 합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사진을 통하여 과거를 보고 현재를 진단하는 것은 물론 미래를 가늠하는 지표로 사진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평소 자신이 하는 사진작업 외에 광주, 전남의 사진역사정리에도 힘썼다. 해마다 겨울과 봄이면 지난 1년간의 모은 자료정리에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꾸준히 모아온 자료들로 만들어낸 것이 `광주, 전남사진사'다.
사진의 예술적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고 자랑스러운 예향 광주, 전남의 사진문화를 새로운 세대에게 계승하는 출발점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반세기 동안의 기록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그 빛바랜 사진과 팸플릿 속에 역사적 숨결을 느끼면서 크나큰 기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분야이든 역사의 맥을 잇는데 자그마한 오류나 실수가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광주, 전남사진사'는 역사자료 이외에도 대한민국국전, 동아국제살롱, 광주, 전남사진대전의 입상작품도 담겨 있다. 창작의 양과 질 모두가 함축된 압도적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사진가는 진실성 있고 보람된 삶을 이어가면서 연구, 노력, 실천해야 합니다.” 광주, 전남 사진예술계의 원로이자 개척자다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