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일
안승일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9.07.2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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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를 말하다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백두산은 나의 스승입니다. 이십 년 전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자연을 복제해내는 머저리 사진쟁이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아직도 갈 수 없는 산'으로 이름 지은 사진전과 사진집 출간에서 사진가 안승일이 말했다. 인생 중 가장 설레는 삶을 백두산에서 살았다며 자신의 가장 중요한 한 매디를 백두산에 묻었다고 했다.

1994년 4월 14일 인천항에서 골든브릿지호를 타고 중국 이도백하에 짐을 풀었다. 4년 후인 1998년 10월 백두산 상공 4천 미터를 넘나들며 2백 통의 필름에 천지 건너편 산들을 담았다. 하늘에서 천지를 바라보며, 백두산을 내려다보며 이제 곧 통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의 두 눈이 뜨거워졌다. 보면 볼수록 옹골차게 다가오는 백두산이 아스라이 펼쳐지는 북녘땅을 구름바다 사이로 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백두산 천지에 출렁이는 한민족의 영혼에 세례를 맞아 그 풍광을 영상화하는 작업이 배달겨레의 하늘이 내린 소명이라고…. 백두산의 또 다른 모습이 보일까 하고 만주벌판을 헤매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빗줄기와 눈보라. 보름이 지나도록 카메라 셔터 한 번 눌러보지 못해도 백두산 신화의 세계에 서 있다는 마음 하나로 황홀했다고 한다. 그 황홀함의 끝에 두 팔 벌려 맞아주는 백두산이 영원불멸의 존재로 보였다. 그날 백두산의 주봉인 장군봉을 중국 쪽에서 찍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장군봉에 깍듯한 예우를 올렸다. 그것이 산악사진가로서 지켜야 할 도리리라 믿었다.

“구름 옷 벗은 백두산은 보인다 해도 보는 게 아닙니다. 구름옷 입고 벗는 걸 다 봐야 백두산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산이 뿜어내는 영혼을 찍고 있다는 확신이 서 있는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백두산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았다. 한순간도 같은 표정을 짓지 않는 백두산에서 그는 짐승의 시간을 보냈다. 산사진가로서, 백두산에서 산의 살갗과 내면을 비춰주는 빛의 다양한 변주를 카메라 렌즈의 눈으로 파악하고 즐겼다.

백두산의 겨울은 혹독했다. 기온이 영하 30도에서 40도로, 영하 50도 밑으로 곤두박질 칠 때도 있었다. 추운 산속에서 눈구덩이를 파고 몇 날 며칠을 먹고 자며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백두산 사진 20년 세월을 보낸 그가 `불멸의 영상'이라는 찬사를 들으면서 전시를 열었다. 2014년 1월 20일~2월 18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백두산 풍광 83점, 자생식물 68점, 곤충 19점 등 1백 70점을 그가 보여줬다. 그는 이미 오래전인 1996년 일본사진가 이와하시와 백두산 사진 2인전을 했고, 1998년 북한인민예술가 김용남과 사진전을, 2001년과 2004년에는 평양에서 남북공동 백두산 사진전을 열었다.

“돌도끼로 짐승 잡던 석기시대 원시인처럼 표준렌즈 하나 달린 사진기 들고 산속을 헤매면서 사진가의 꿈을 키웠다”는 그는 1946년 서울의 빈곤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생 열심히 사진 찍다 죽으면 누군가 유작사진집 하나쯤 만들어 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충무로 광고사진스튜디오에서 먹고, 자고, 찍으며 모은 오백만원을 들고 아버지에게 갔다. 그때 살던 곳이 달동네 여섯 평짜리 집이었는데 백만 원쯤 했다. 아버지에게 돈을 내려놓았다. “야 이눔아 집을 늘려갈게 아니라 네 사진집을 만들어야지.” 아버지의 호통에 달동네를 뛰어내려 와 사진집 `山'을 출간했다. 생애 첫 작품집이었다.

그의 사진 역정 50여 년에 어느 하나 흘려 버릴 것이 없다. 11권의 사진집 중에서도 특히 삼각산, 굴피집, 아리랑, 아직도 갈 수 없는 산 등 그 책에는 사진가 안승일의 의지와 열정, 그리고 눈물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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