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인이자 사회활동가인 뮤리엘 러카이저는 `세계는 원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말했다. 물리학자가 듣기에는 참으로 거북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깊은 통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존재란 무엇일까?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 존재란 무엇일까? 눈에 보이면 존재하고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의 오감으로 관찰될 수 있어야 존재하는가? 하지만 우리의 오감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도 하고 없는 것을 보기도(환청·환시·환각) 한다.
존재의 문제는 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의 중요 주제 중 하나다. 하지만 아직도 인간은 존재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이 세상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존재를 텍스트적인 존재와 컨텍스트적인 존재로 나누기를 좋아한다. 책으로 말하면 텍스트는 글자로 쓰인 내용이고, 컨텍스트는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맥락적으로 나타나는 그 무엇을 말한다.
여기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고 하자. 나무, 돌, 꽃들로 이루어진 정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정원의 아름다움은 존재하는가? 당연히 아름다움도 존재한다. 여기서 정원을 텍스트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아름다움은 컨텍스트적인 존재이다. 사실, 텍스트적인 존재보다 컨텍스트적인 존재가 정원이라는 존재에서 더 중요할지 모른다.
텍스트적인 존재는 시공간 상에 국지적으로 존재한다. 텍스트적인 존재는 언제,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컨텍스트적인 존재는 시공간에 편재되어 있다. 정원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사실,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컨텍스트적 존재를 텍스트적으로 물었기 때문이다. 정원의 아름다움은 꽃에 있는 것도, 나무에 있는 것도, 정원석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그 무엇인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학술적 연구 활동에서조차 이 두 존재의 구분을 무시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논쟁을 하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하느님은 텍스트적인 존재인가, 컨텍스트적인 존재인가? 만약 하느님이 텍스트적인 존재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어디에 있는가', `백인이냐, 흑인이냐?', `키는 얼마냐?'등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하느님이 컨텍스트적인 존재라면 이런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텍스트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컨텍스트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정신도 마찬가지다. 정신은 뇌신경망이 만들어내는 컨텍스트적인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뇌를 전자현미경으로 샅샅이 뒤져도 정신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신은 컨텍스트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컨텍트적인 존재를 텍스트적인 존재로 착각하는 것은 사고의 수준이 유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텍스트적인 존재를 컨텍스트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깊은 통찰의 결과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나'라는 존재는 분명 텍스트적인 존재이다. 남자이고, 키가 170센티미터이고, 몸무게가 65킬로그램인 텍스트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나라는 존재의 전부일까? 내가 살아온 과정, 인간관계, 내가 하는 생각 등은 이 `나'라는 존재에 속하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보면 `나'라는 존재는 텍스트적이 아니라 컨텍스트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이 원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되어 있다는 것도 세상이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존재스러운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