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은 나하고 말로 싸우지 않는다. 신혼 시절 부부싸움을 하면서 집사람은 나에게 무수히 당했다. 철학의 기초는 논리학부터 시작한다. 나는 논리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 논리를 배우지 않은 집사람이 논리로 무장된 나를 이길 수는 없다. 분명히 내가 잘못해서 시비를 걸어봤는데 결과적으로는 집사람 잘못으로 끝나니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철학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말싸움을 해서 이기는 기술을 가르쳐서 먹고살기도 한다. 프로타고라스는 말싸움을 가르쳐서 먹고살았다. 지금으로 치면 10억대 연봉을 받는 스타급 강사보다 훨씬 고급 수준의 교육을 시키고 그에 상응하는 수업료를 받았다고 한다. 어느 학생이 다 배우고 나서 돈을 주겠다고 하고 외상으로 말싸움을 배웠다. 다 가르쳤는데도 수업료를 내지 않아서 돈을 받기 위해 소송을 걸었다.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편다. 당신은 나에게 어떤 경우에도 돈을 지불해야 한다. 재판에서 지면 법에 따라서 나에게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고, 재판에서 이기면 나에게 잘 배웠기 때문에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에 대해 제자가 응대한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이기면 법에 따라서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지면 잘못 배웠기 때문에 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철학에서는 이상한 논리들이 많다. 소피스트나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은 절대적으로 참일까? 절대적으로 참이라면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게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가 하나는 있다. 만약에 절대적이지 않다면? 이 주장이 상대적이라는 건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말이 그릇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주장이 틀릴 수 있다면 절대적인 진리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있는 걸까, 없는 걸까?
파르메니데스라는 철학자는 서양의 철학사 3000년을 지배한다. 그의 논리도 이상하다. 있거나 없다(to be or not to be). 있으면서 없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경우는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없는 걸 생각할 수는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있는 걸 생각하지, 있지 않은 걸 생각할 수 없다. 또 죽은 사람이 생각할 수는 없다. 생각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어야 한다. 곧 이 세상에 있어야 생각할 수 있다. 있음을 전제로 하는 생각이 없음을 담을 수는 없다.
태어난다는 건 무얼까? 없다가 있게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죽는다는 건 무얼까? 있다가 없게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태어나거나 죽기 위해서는 없음이 개입돼야 한다. 따라서 없음을 언급해야만 가능한 태어남과 죽음은 있을 수 없다. 곧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이쯤 되면 황당하다. 이 황당한 논리를 서양의 철학자들은 3,000년 동안 금과옥조처럼 떠받들어 왔다. 더 황당하고 이상하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시조라고들 한다. 그는 모든 걸 의심한다. 감각적인 지식도 의심하고 수학적 진리도 의심하고, 내 앞에 물건이 있다는 것도 의심하고, 신의 존재도 의심한다. 100% 확실한 건 있을 수 없다고 의심한다. 모든 걸 의심하고 있지만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 의심하는 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게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언이다.
의심하는 나(a)는 누구이고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나(A)는 누구인가? 내 안에 내가 둘이라고? 상식적인 입장에서 보면 황당하다.
철학을 공부해온 나로서도 철학자들의 논리는 황당하고 이상하다. 이런 논리에 말려서 말싸움에서 지기만 했던 집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한 사람하고 산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요즘 집사람은 나하고 말싸움을 하지 않는다. 단답식으로 명령을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