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동안 오직 석탄산업의 원천인 탄광 갱 속에서 사진을 찍어온 사진가 김재영. 그는 “탄광을 사진으로 남겨 후세에 보여 주는 것은 나의 의무이자 책임이었고, 그것이 역사의 중요성을 기록하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77년 은행에서 근무할 때 업무특성상 광업소에 갈 기회가 많아 자연히 석탄산업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탄광에 근무하는 형님의 영향도 커 그곳 광부들의 근로실태 현실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처음 막장에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광부들의 거부감이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마지막 일터라고 말할 정도의 열악한 그곳을 들어가는 것은 2차 문제고, 우선 석탄을 캐내는 광부들을 왜 사진으로 남기려 하는지 설득하는데만 긴 날이 필요했다.
그는 사진가 로버트 카파의 사진에서 집념과 열정을 느끼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수많은 날을 `광부들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다소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다시 찾아간 갱 속에서 만난 광부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당시 그의 카메라가 니콘 FM이었다. 36커트 필름을 찍어 현상하고 나서 살펴보니 1~2장의 결실을 얻었고, 그렇게 태어난 자신의 얼굴을 본 광부들이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삽시간에 그의 이름이 광업소마다 알려졌고 협조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그는 탄광을, 광부들을 찍는 작업에 불이 붙었고, 갱속에 들어가 1시간에서 길게는 9시간 동안 머무른 적도 있었다. 우리나라 탄광 100여 군데를 찾아 광부들과 함께한 그의 사진작업이 계속되면서 모든 마음의 중심이 오직 석탄광산 광부 사진에 있을 뿐 다른 잡념이 그의 머리에 생길 틈이 없었다.
“50년에서 100년 이후를 내다보면서 찍었어요. 에너지의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석탄산업의 기록이 박물관에서 역사교육자료가 되는 것을요.”
그의 거듭된 탄광 사진작업에 사용된 카메라가 병들어가고 있었다. 석탄이 캐내어 지는 갱구 안의 유황과, 철분과 뒤범벅된 습기와 분진에 훼손되고 있는 카메라 렌즈, 마운트 등이 부식된 것이다. 사진을 보다가 좀 더 좋은 작품을 위해 안셀애덤스가 발명한 `존 시스템'을 배웠다. 밝고 어두운(명암) 콘트라스트의 1단계에서 100단계를 익히고 현상과 프린트까지 직접 해내었다.
“살면서 최고의 희열을 느꼈어요. 정말 재미있고, 오묘하고 기막힌 내 작업의 대견함에 모든 고민과 어려움이 사라졌지요.”
1908년 석탄산업개발이 시작되어 일본으로 송출되고, 1936년 경북 상주에서 공식 출발한 석탄광역사지만 광부들에겐 진폐증이 찾아왔다. 현대의학으로 못 고치는 광부들의 진폐증은 폐가 정상인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불치의 병이었고,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주어진 수명을 다하지 못한 안타까움 이상의 슬픔이 서려 있다. 석탄을 캐내려고 탄가루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광부들, 이제 일부만이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는 지금 진폐증 환자들도 필름에 담고 있다. 지난 세월동안 모은 탄광 장비가 수천 점이 된다는 그는 언젠가 사람들에게 모두 전시하여 보여줄 계획이란다.
“보면 눈물이 깊게 스며 있어요. 광부들 삶의 몸부림 속에 함께 한 애환이 한편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하겠지만요.”
현재 남아 있는 석탄광산은 태백에 2개, 삼척 2개, 전남 화순에 1개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300여 개 탄광이 폐광되고 그곳에서 안겨진 진폐증 광부들만이 옛 이야기로 석탄과 운명을 같이 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석탄광 광부들과 함께해온 사진이 있어 유형적 자산으로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니 나는 상당한 마음의 부자입니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