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도시생활 속 마음 한켠엔 항상 홀어머니 걱정
노모 · 아내와 소박한 삶 “이게 바로 행복 아닌가요”
유난히도 무더웠던 한여름 열기가 채 식기도 않았는데 추석이다. 명절하면 고향을 연상시킨다. 그런 탓에 명절이면 민족대이동이 이뤄진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을 나서는 것이다. 그런 고향을 찾는 이들의 사연도 많다. 누구나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살면서 귀향을 꿈꾼다. 하지만 꿈을 현실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귀향을 실천한 이들의 용기와 결단이 부럽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다시 찾아간 귀향인들의 그들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고향이 늘 그리웠다.
타향살이를 하며 집도 샀고,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아내도 있고, 공직생활도 탈 없이 했으니 무엇이 부러울까 싶었다.
그래도 가슴 한켠이 늘 허전했다. 고향에 남겨둔 홀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비가 오면 어쩌나, 눈이 오면 어쩌나 걱정을 달고 살았다. 팍팍한 도시생활을 접고 며칠만이라도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유년시절처럼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낮잠을 자보는 게 소원이었다.
장호동 전 충북도교육청 적정규모 육성 추진단 사무관(61·사진)은 지난해 7월 공로연수에 들어가면서 도시의 삶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38년 만에 돌아온 고향인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는 그대로였다. 10년 전 작고한 아버지는 없지만, 고향 산천을 지킨 어머니 김차름 여사(84·안토니나)가 있었다.
5형제 장남인 장 전 사무관은 아침마다 눈을 뜨고 어머니에게 문안인사를 하는 것이 꿈만 같다. 슬리퍼 신고 대문을 나가도 만나고 싶은 유년시절 친구 20여 명이 기다리고 있고, 대문에 들어서면 든든한 아내와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다.
장 전 사무관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노후는 고향에서 정착해서 살고 싶었다”며 “예전에는 집을 나서면 긴장감이 감도는 직장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대문을 나서면 허물없이 술 한잔 기울일 친구가 있고, 집에 돌아오면 평상에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나눌 아내와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장 전 사무관은 괴산 연풍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장남인 그는 농협 사환으로 취직해 가계 경제에 손을 보탰다. 22세 되던 해 고향을 떠났다. 공부를 하고 싶어 9년간의 사환 생활을 접고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사설독서실에 총무로 취직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5년간 일하면서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27세 때 공무원 총무처 시험에 합격해 공직에 들어섰다.
충북도교육청에서 장 전 사무관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했다. 중, 고 검정고시를 거쳐 사무관자리까지 오르기가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장 전 사무관은 단양, 충주, 괴산, 청주 등 근무지 따라 떠돌이 생활을 했다.
장 사무관의 어머니는 성경 필사를 통해 아들의 건강을 챙겼다.
2년에 한 권 완성할 만큼 고된 작업을 그의 어머니는 14년 동안 7권을 완성해 5형제에게 나눠줬다.
퇴직 후 고향에 둥지를 틀 큰 형을 위해 10년 전 동생은 한옥을 지었다.
퇴직 후 삶을 일구기 위해 그는 2013년 2310㎡ 부지에 사과나무 200주를 심었다.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이 닿은 사과를 올해 첫 수확해 추석 차례상에 올리게 됐다.
장 전 사무관은 “너두 나도 모두 가난했기에 소풍을 가도 감자, 고구마를 싸 가지고 왔고, 추석이면 옷이 귀했던 시절이라 동네 친구들은 추석 빔 자랑에 날새는 줄 몰랐다”며 “어머니도 추석이면 장에 나가 옷을 사오셨다. 올해는 아들이 수확한 사과를 차례상에 올릴 수 있고, 어머니께 맛보여 드릴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장 전 사무관은 1년째 고향의 품에서 삼시세끼 어머니의 손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직도 꿈만 같다.
/김금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