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들어서려는데 유리문에 비친 진천 상신초 운동장 모퉁이의 나무가 어느덧 곱게 물들어 있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아이들과 이 계절을 느껴봐야겠다며 글램핑을 가자고 했다. 막상 나오니 지쳐서 얼른 씻기고 쉬자고 했더니, 캠핑의 꽃은 불멍이라며 장작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타닥이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앉아있으니 비로소 분주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평소 퇴근이 늦는 나를 대신해 아이들 하원을 맡아 급한 업무는 싸들고 집에 오는 남편. 일렁이는 불 앞에서 촘촘하게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서로를 격려해 본다. 그리고 내년 첫째 입학을 앞두고 마음이 조급해져 학원에 가서 상담을 받은 얘기를 나눈다. 일하느라 바빠서 학습적인 부분을 잘 못 챙겼다는 나의 말에 선생님이 우리 모두 일하는 엄마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며 웃었는데, 좋은 핑곗거리라는 대화의 뒷맛이 씁쓸했음을 공유했다.
얼마 전에 본 `바쁘다는 것은 악에 가깝다'는 유튜브 영상이 생각이 났다. 이동진 평론가의 프린스턴 대학원 심리학 실험 이야기였다. A건물에 있는 학생들에게 공부한 것을 B 건물에서 발표할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건물로 향하는 길목에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연기자를 배치한다. 어떤 사람들이 안 도와주고 어떤 사람이 도와줄까? 실험 결과에 유의미한 요인은 `시간'이었다. 발표까지 남겨진 시간. 시간이 없으면 남을 돕지 않았다.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바쁘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휴무에는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었는데 출근하는 아침마다 아이들을 다그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길벗어린이에서 나왔지만 220쪽이나 되는 두께감만큼이나 묵직한 내용의 어른들이 더 공감할 수 있는 그래픽노블, `어쩌다 보니 가구를 팝니다'(이수연 저·길벗어린이)의 78쪽에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아이의 표정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곧 저 아이의 그런 표정들이 희미해질 것이다. 아이의 시간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지나간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 개를 손에 쥐면 한 개를 손에서 내려놓아야 한다'라는 구절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는다.
아이 수업 시간에`집'을 주제로 수업을 했다고 한다. 집은 뭐 하는 곳이래? 라는 질문을 던지며 먹고 자고 씻는 걸 대답을 기대했는데, 우리 가족의 짐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뜻밖에 대답에 무릎을 쳤다. 학습지 선생님이나 정수기 점검할 때마다 정돈되지 않은 일상 속으로 누군가 들어올 때 느껴지는 부담감을 들킨 것 같았다.
이수연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의 주인공 넥타이와 슈트 차림의 가구회사 여자 곰 영업사원은 `집은 직관적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때로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면까지도(p.22)'라며 꿈에 등장하는 낡은 집이 바로 살피고 돌보아야 할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사실, 정상이 아닐지도 몰라요. 혼란스러운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아요. 삶은 모두에게 처음이니까요.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잘 모르겠는걸요(p.179)'라는 새 고객의 말도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지켜나가는 것도 꿈을 꾸는 것만큼 아름답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아.(P.206)'라는 개 영업사원의 말도 감정이입해서 읽게 된다.
어쩌다 보니 떨어지는 낙엽들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면, 불완전한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면, 그러니까 다 괜찮다는 위로가 필요하다면 아름다운 그림이 가득한 이 책을 펼쳐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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