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가면
시장에 가면
  • 김일복 시인
  • 승인 2024.09.08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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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수만 년이 흘러 침식되어도 바위 바닥은 평평할 수 없다. 세상 모든 부산물이 쌓인다.

땅이 사라지지 않는 한 퇴적의 시간은 나를 바닥으로 이끈다. 날카롭고 까다로운 기분도 시장에 가면 시원하고 개운해진다.

무척 기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시장에 가면 안 풀리는 일도 술술 풀리는 것 같은 신기한 생각이 든다.

시장엔 없는 것 빼고 있는 건 다 있다. 그래서 시장은 우주다. 미래가 있고 삶의 전부다. 그래서 지치고 힘들 때 `너는 할 수 있어'라며 기운을 주는 곳이 시장이다.

언제부턴가 시장에 가면 쪽파 껍질 까는 할머니도, 생닭을 칼로 내리치며 손질하는 누나도, 어물전 동태 머리를 쳐대는 애교 많은 새색시도, 방앗간 집 떡 파는 이모도, 신발가게 누나도 나는 다 어머니라고 부른다.

좌판도 없이 시장 골목 상점들 사이 모퉁이에서 쭈그린 채 쪽파 껍질을 까는 할머니를 보면 내 어머니의 어머니가 생각난다.

이북에서 내려와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셨다는데 나는 얼굴을 뵌 적이 없다. 사진으로 보고 나서 모든 할머니는 다 내 할머니처럼 똑같이 생겼다는 걸 어릴 적 알게 되었다.



어미의 어미



허연 머리카락 머리에 이고

주름진 손등으로

몇 시간째 쪽파의 껍질을 벗기는 어미는

고개가 아플 때쯤이면

잠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끈다.

그 어미에 어미도 그랬으리라

잠시 한풀 꺾여 풀죽은 듯 머리를 숙이고

어느 사이 한 접 넘는 마늘을 따 깠다.

어둑한 밤도 구부러지다 못해 머리를 숙이고

무게중심을 잃은 채 다리는 휘청거린다.

온종일 다 팔아도 관절염 약값도 안 되는걸

아는 어미는 어미의 앉은 자리에서

딸의 행복을 저축하고 있다.



시 「어미의 어미」 전문



어머니가 파는 물건값을 어떻게 정할까?

물건은 많고 사는 사람은 적으면 값이 싸게 정해지는가? 새벽잠을 못 자고 버스에 피곤한 몸과 보따리를 실어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어머니들, 노상에 앉아 보따리를 풀어 놓은 채 텃밭에서 키운 쪽파를 주름진 손등으로 껍질을 까고 있다.

회전하는 오늘과 정점을 달리는 내일과 미래를 위해 해 가 늦도록 장사를 하신다.

예쁘고 솜털 같은 누나의 눈빛이 오목한 웅덩이에서 구부러진 밤을 읽는다. 들쑥날쑥 빛이 춤출 때 다시 살아나는 손놀림이 있다. 영원히 탄탄대로 갈 것 같던 어머니의 시간은 없다.

발걸음이 빨라지는 사람들의 소리를 여기저기서 잡아당겨 하루를 팔아도 관절염 약값도 안 된다. 그런데도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시장에는 돈으로 계산 하지 못하는 희로애락이 있는 곳이다. 멀리서 달려 올 것 같은 희망이 있기에 조용한 몸짓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어머니는 우주 존재의 상징이며, 모두의 인격이며 사랑이다.

수만 년이 흘러도 바위 바닥이 평평할 수 없는 이유다.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 앞에 때로는 울컥하기도 하고 때로는 뿌듯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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