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을 보면 왕이 직접 영토를 돌며 국경 상황과 백성의 삶을 살피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렇게 왕이 나라를 두루 살피는 것을 순행이라고 하는데, 고대국가에서 순행은 왕의 직능이나 권위를 강하게 표현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삼국시대 순행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시기별로 차이가 있지만, 오늘은 5~6세기 신라의 대외팽창 과정에 있어 순행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시기 신라왕의 순행이 고도의 국왕의 권위를 강조함과 군사·정치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순행의 목적은 유교 질서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는 ??예기 禮記?? ?왕제 王制?에서 찾을 수 있는데, “천자는 5년에 한 번씩 제후 지역을 순행하는데 2월에는 동쪽으로 그리고 5·8·11월에는 각각 남·서·북쪽으로 순행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때 대산(태산)·남악·서악·북악에 이르러 나무를 태워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제후들의 정치를 살피고 만약 제후들이 산천의 신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였으면 불경죄로 영지를 삭감하였다.”라는 내용이 확인된다.
우리 역사에서 순행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찾을 수 있다. 1세기~7세기 동안 순행 횟수는 113회(고구려 47회, 백제 36회, 신라 30회)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실제로는 광개토대왕비·진흥왕순수비·중원고구려비·울진 석류굴 등의 금석문을 살펴보면 순행의 횟수가 문헌 기록보다 더 많이 나타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5~6세기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 중에 왕의 순행은 국왕의 권위를 강조함과 동시에 군사·정치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소지마립간 10년(488)에 새로이 편입된 일선군(지금 김천) 순행과 동왕 22년(501) 날이군(지금 영주시) 순행 기사 확인되며, 법흥왕 11년(524년)에 남쪽 변방 순행(지금의 금관가야지역) 중 가야 왕과 만나 정상회담 기사가 확인되고 있다. 또한 진흥왕 12년(551) 낭성 순행 기사와 동왕 16년(555) 북한산(서울지역) 순행기사 그리고 진흥왕 순수비(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창녕비)와 진흥왕 21년(560)에 울진 석류굴 행차 명문 등의 순행기사가 확인되고 있다.
소지마립간 기사에서는 소백산맥 일대인 추풍령-조령-죽령 중요 교통로를 장악함으로써 한강 유역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함과 날이군 유력자인 파로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신라로 완전히 영역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법흥왕 순행기사에서는 금관가야 영역이 신라로 편입되는 과정과 정상 간의 만남은 가야권역 내에서 힘의균형이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변화되는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신라 왕들의 순행은 그 지역이 가진 반신라적 요소를 친신라적 요소로 변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소지마립간과 진흥왕은 순행을 통해 새로 편입된 영토를 확정하는 한편, 곡식을 나누어 주고, 죄수를 풀어주는 등 직접 민심을 살폈다. 이는 왕도 정치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지역민들을 신라에 우호적으로 포섭해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양상은 `신라적성비'에서도 나타나는데, 신라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는 지방민에게 공을 세운 본인은 물론 가족에 이르기까지 포상하는 신라의 `적성전사법(赤城佃舍法)'이 확인된다.
따라서 순행은 첫째, 기본적으로 신라왕의 유교 질서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구현이며, 둘째, 신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영토를 친신라 지역으로 재편하고자 한 것으로, 이를 통해 영토 유지에 필요한 역과 조세 수취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지지 확보의 일환이었다. 셋째, 순행의 의미는 고대국가의 성장 및 왕권과의 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