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以念念念(여이념념념) 만일 생각으로 생각한다면
念念非眞念(념념비진념) 생각을 생각하는 것은 참다운 생각이 아니라네
將眞治妄念(장진치망념) 참다운 생각으로 잘못된 생각을 다스린다면
未苦無一念(미고무일념) 괴로움 일어나기 전처럼 한 생각도 없다네.
이 곳 백두대간 속리산 화양구곡의 채운암에도 한 줄기 바람에 가을이 묻어 옵니다. 이 시간에 탁마할 공안은 단도직입형 공안인 무문관 제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4.입니다.
수행승들이 서당과 동당으로 나뉘어 싸웠을 때, 남전 선사는 분란의 원인인 고양이를 제거했습니다. 이를 화합을 위한 결단으로 본다면, 이 때 남전 선사가 지적하는 것은 경전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자기 언어를 가질 것을 말하는 참된 자아에 대한 역설 따위가 아닌, 고양이라고 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심(佛心)을 해치는 요물이라는 단호한 고함이라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기에 수행승들이 입을 다물었을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고양이' 그 자체가 아닌 `고양이를 죽이려는 남전 선사의 칼날' 입니다. 그러니까 고양이의 목숨이 아닌, 다른 개체의 더 나아가 타자 대한 목숨을 거두느냐 마느냐에 대한 불교의 불살생 계율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는 곧 살생의 정당화를 묻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서 조주 선사가 신발을 머리 위에 올리고 간 것은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사관을 초탈한 자의 깨달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에 남전 선사가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한 것은 고양이를 살리고 자 한 자비의 마음 따위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은 끝에 붙이는 유머같은 질문의 진정한 뜻을 다시 한 번 갈무리해주고자 남전 선사 자신이 던진 질문이 처음부터 고양이를 죽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불교의 불살생 계율에 집착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함의를 내포한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이 논리는 숭고한 목적을 위한 살생이라는 극단적 수단도 용인된다는 식의 논리로 뻗어나갈 수가 있으니 이 숭고한 목적이 항시 변화하는 세상만물의 흐름 속을 바르게 한다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고정된 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불교의 논리와도 전혀 위반되지 않는 논리체계이기도 합니다만 남전 선사 또한 아무리 대의라고 하지만 불살생계를 범한 인과는 분명하겠지만 말이지요.
어쨌든 남전 선사는 고양이를 죽이면서까지 제자들에게 법을 바로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법을 올바로 전해야겠다는 의도를 이야기하는 방편으로 고양이의 목을 벤 것은 고양이 목을 베었다는 사실보다는 대중이 모양에 속아서 법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각자가 스스로의 무명을 단칼에 베라는 함의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을 살생하라는 말이 아니라 무명을 그만큼 단호하게[ 베어버리라는 말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무문관 제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5.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여기 무각스님과 함께하는 무문관 공안으로 보는 종횡무진 자유로은 선(禪)과 함께하는 모든 분들이 부디 행복하시고 여일하길 두 손 모아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