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경종 태실 훼손사건
1831년 경종 태실 훼손사건
  • 김도연 충북도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장
  • 승인 2024.08.04 1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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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문화유산의 이야기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는 조선 20대 왕인 경종의 태실이 있다. 『현종개수실록』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를 선택하여 태를 묻고 태봉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경종 태실도 뒤로 발미산의 능선이 태봉을 감싸고 그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 기록에서 보이는 태실의 입지와 유사하다.

조선 왕실은 태 주인의 축복과 무병장수는 물론 이를 통해 왕실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측면에서 태실을 조성하였고, 이러한 행위는 주요 의례의 하나로 지속되었다. 또한 조성한 태실에는 수호군을 배치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하였으며, 태실이 훼손되면 이를 조사하여 관련자를 처벌하는 등 관리에도 힘썼다. 조선시대 기록에서 보면 태실이 훼손된 사례가 확인된다. 태실의 훼손 원인은 전란이나 재해 등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훼손한 사례도 종종 보인다. 특히 1831년(순조 31) 경종 태실을 훼손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종 태실의 훼손은 충주 목사 민원용에 의해 처음으로 보고되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태실의 석물이 넘어지고 손상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건이 보고되자 조정에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어 사건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관찰사 홍희근은 사건의 조사를 위해 산 아래에 사는 백성과 감관 등을 모두 잡아 가두었고, 죄인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사건을 조사한 결과 태봉직(胎封直)에게 화를 전가하기 위해 변고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의 자초지종이 밝혀지자 조정에서는 죄인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먼저 사건을 주도한 김군첨의 경우 본래 관계가 있는 자들까지 모두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전패작변(고을 객사에 모셔진 임금 상징물을 훼손하는 일)에 대한 나라의 법이 한 사람만을 죽이는 데 그쳤으니, 이것을 원용하여 김군첨을 사형에 처하였다. 또한 공범 11인은 유배로 처벌하면 그 중한 범죄를 덮기에 부족하니 감사(減死, 형률에 따라 사형에 처할 죄인을 특별한 사유로 인해 죽이지 않고 감형하여 주는 것)하여 본인에 한하여 원악도에 노비로 삼았다.

범인의 처벌과 함께 지방관의 죄를 묻는 것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이에 좌의정 이상황은 외도(外道)의 일이 있어 비록 강상 등에 관련된 옥사가 있었음에도 관찰사가 이에 따라 죄를 입은 전례는 없었다는 점, 전패작변한 고을의 수령의 경우에도 선대 왕의 성의(聖意)에서 죄를 논하여 다스리지 않았던 것 등을 고려하여 논죄하지 않기로 하였다.

조선시대 기록을 검토해보면 태실이 훼손된 사례는 다수 확인된다. 다만 경종 태실의 경우 앞의 내용처럼 훼손된 상황, 사건의 조사와 처벌, 태실의 수리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각종 사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어 중요한 유적에 해당한다. 특히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조선 왕실에서 태실을 바라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조정에서는 경종 태실을 훼손한 범인을 전패작변의 예에 따라 처벌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의 상징물을 훼손한 대역죄로 판단한 것이다. 즉 태실은 임금을 상징하는 주요 시설물로 인식하였던 셈이다.

최근 태실 유산에 대한 가치가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특히 경종 태실은 조선 후기 태실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통해 그 가치가 더욱 빛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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