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봄이 오면 가끔 한 노인의 말이 떠오른다. 꽤나 오래전 일이다. 황학동 시장 언저리를 지나는 길이었다. 담벼락 아래 따스한 봄바람에 장단 맞춰 꾸벅이며 급기야 고개까지 떨구며 조는 노인 앞으로는 대충 쌓은 벽돌 위에 나무판때기 얹어 놓은 왠지 탁자인 듯 보이는 무엇과 목욕탕의자 두어 개가 놓여 있었다.
`전생을 알려드립니다. 단돈 오천원' 자세히 봐야 탁자로 보이는 것에 청색박스테이프로 칭칭 둘러 붙여둔 누런 골판지 위에 쓰인 문구였다. 그것이 하필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도 있었고 때마침 시간도 있었고 하필 주머니에 오천원도 있었다. 혹여 꿀잠 깨실까 목욕탕의자를 조용히 끌고 와 노인 앞에 앉아 조만간 깨시길 기다렸다. 그 후로도 한참 노인의 봄바람 장단놀이는 이어졌다. 기다림이 슬슬 지겨워 목욕탕의자를 바닥에 살살 긁으며 그만 깨시어 손님 받으시라고 기척도 해보았으나 당분간 노인의 봄 장단에는 쉼도 끝도 없을 듯 보였다. 전생도 전생이지만 꽃 날리는 봄날에 길 위에서 잠이 든 노인이 측은해 탁주 값이라도 몇 푼 보태드리려는 심산도 있었다. 그러나 곤히 잠드신 평온한 모습에 그 마음도 접어두고 즐기시던 봄이나 마저 실컷 즐기시라고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분내가 코를 찌르는 구나” 아마 그날도 향수를 뿌리긴 뿌렸을 것이다. “네?” 오천원 지폐 바르게 펴서 판때기위에 아니 탁자위에 올려놓고 바로 앉았다. 잽싸게 주머니에 지폐 구겨 넣자마자 두 눈 지그시 감고 말을 이으신다. 그이의 잠귀는 어두웠을지 모르나 행동은 빠르고 게다가 치밀했다.
“기생이었구먼”, “네? 기생요?” 정확히 들렸지만 되물었다.
“진주 기생 아니아니 평양기생.” 여하튼 기생이란다. 장군은 기대도 안했다. 여자였다니.
“꽃은 꽃인데 향기는 없고 애써 피웠으나 보는 이도 찾는 이도 없고 잔 잡아 권하실 이 하나 없네. 향은 없고 한만 서렸으니. 딱하다 딱해.”
봄바람에 맡긴 그의 몸 장단이 쉼이 없었듯 봄바람 탄 그의 말에도 쉼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 반쯤 숙여 두 눈 올려 뜨며 의도는 의미심장하게 하려한 듯 했지만 전혀 그렇게 느껴질리 없는 말투로
“봄만 되면 왠지 맴 속이 허하고 괜히 붕 뜨지 않어?” 봄이면 누구나 그렇지 아니한가.
“네 좀 그렇기는 한데...” 말을 이으려했으나 그는 들을 마음이 없다.
“춘여사 추사비라. 봄 타는 기생이었던 탓이지. 봄 만 탔겄냐. 거문도 타고 가락도 타고 굽이굽이 임 향한 애절한 그리움에 속도 탓겄지.”
보이지도 않는 허공에 대고 손가락 거문고를 뜯는다. 가슴에 두 손 다소곳 모으고 먼 하늘도 바라본다. 혼자만 신나셨다. 몇 푼 탁주 값 벌어 좋고 어린놈 골려먹으니 신났을 것이다. 그는 이미 낮술을 자시신 것이 분명했다.
“여자한테 상처주지 마러.” 뜬금도 없고 맥락도 없다.
“네?” 여전히 내말은 들을 마음이 없는 그이는 무언가가 급하다.
“이번 생 한 풀러 왔으면 한이나 풀고 가면 되는겨. 전생에 꽃 참 좋아 했잖어. 전생에 못 다한 꽃놀이나 실컷 다니며 살어. 그게 한 푸는 거여. 요즘 날도 참 좋잖어.”
때마침 내가 파장 손님이었는지 나라도 찾아와서 파장이 된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나 앉아있던 의자 뺏다시피 들어 포개 나무판자에 던져놓고는 황급히 발걸음도 가볍게 골목으로 노인은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이 채 5분도 소요되지 않은 그리고 지금도 가끔 지인들과 술자리에서 농 삼아 얘기하는 내 전생 사건의 전말이다.
그때는 몰랐다. 꽃 볼 줄도 몰랐고 꽃 좋은 줄도 몰랐다. 아니 아직도 잘 모른다. 남도는 매화가 한창이란다. 기다리면 이곳에도 꽃피는 줄 모르는바 아니나 남도로 꽃 마중 봄 마중이나 가야겠다. 팔자 좋다 하지마라. 전생에 한이 많아서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