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에서 열린 U-20 월드컵대회에서 한국이 4위의 성적을 거뒀다. 결코 간단스럽지 않은 성적인데 우리는 이를 `신화'로 부르지 않는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올해 U-20 월드컵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국민은 대체로 알지 못했다. 아마도 첫 경기에서 프랑스를 이기지 못했다면 미디어의 기록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직전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쾌거가 있었음에도 이강인 선수처럼 집중조명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U-20 팀에 대한 관심을 만들지 않는다. 국가대표 A매치에는 관중이 경기장을 꽉 채우는 경우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린 선수들은 승승장구했으며, 절대 능력의 특정선수에 의존하지 않는 낯선(?) 팀플레이와 상대팀에 대한 김은중 감독의 탁월한 전술과 지도력, 그리고 묵묵히 체력을 다져온 `과정'의 빛남이 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U-20팀이 고군분투하며 승리를 거듭하면서 16강과 8강, 4강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아름다운 투혼을 불사를 때, 함께 기뻐하고 응원할 만큼의 `희망'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대회기간 동안 낭보는 이어지는데, 그 빛나는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결과만 보고 숟가락을 얹는 꼴이 더 싫을 만큼 두껍고 높은 세상의 벽이 두렵다.
설마 이 지경으로 세상이 무너지고, 이 정도까지 퇴행하며, 편을 갈라야 직성이 풀리리라 추측으로나마 가늠했던 투표였을까. 그리고 이 모든 모순과 회귀, 그리고 위기와 불안이 단순히 정권이 바뀐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입만 열면 전 정부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푸념의 이면에 전임 정부 시절 `바로 잡는다'는 명분으로 포장된 오만과 편견, 그리고 독식의 편가르기와는 다른 것이라는 생각은 설득력이 없다.
36년 전 아스팔트에 넘쳐났던 6월 항쟁 이후 민중은 스스럼없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민주주의는 성숙했으나, 그 후 새로운 지배권력이 만들어진 것은 `광장과 거리'의 진정한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전한 정전상태의 한반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초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위기는 충분히 경계하고 우려하며 물샐 틈 없는 대비를 해야 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국민은 없다. 다만 정권의 입맛에 맞는 `벽'을 만들면서 낡은 냉전의 시대로 스스로 빠져드는 되돌림은 모두에게 불안하고 불행한 일이다. 게다가 국제적으로도 뚜렷하게 구별과 차별을 거르지 않는 편 가르기 또한 얼마나 위험스러운 `벽'을 만드는 것인지를 깨닫는 일이 그 `편'에서는 그토록 불가능한 일인가.
`전쟁'은 신화와 영웅을 만들고, 민주주의는 진영의 다툼으로 비하되는 시대의 높은 벽은 일방적이지만 상대적이다. 4월과 5월, 6월, 그리고 한겨울의 한파를 뚫고 거리에서 광장에서 절규하던 수많은 보통사람의 피와 땀과 눈물은 끝까지 선명해야 한다. 이념과 친일, 그리고 자본의 권력이 뚜렷한 한쪽의 모순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거리와 광장에서 죽음과 눈물로 지켜내고 진전시켜 온 민주주의의 숭고한 이름 또한 신흥 권력의 수단으로 삼은 다른 한편의 전유물로 여긴다는 것 또한 묵인된 것은 아니다.
노동의 가치는 실종되고, 기업과 자본에는 한없이 관대한 불공정의 세계.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함부로 흘려보내도 `지금/여기' 권력층과 당장의 세대들에게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벽'이 있다. 그 물은 당장의 고단한 어민과 시장의 절망을 가져올 것이며, 소금과 수많은 해산물을 두렵게 만들 수 있는 새롭고 견고한 `벽'도 만들 것이다.
선택되고 선출됨으로써 권력의 위치에 오른 한 시인은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고 노래했다. 그리고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고도 했다. 희망이 있고, 절망을 놓지 않을 수 있는 `함께'의 뜻이 살아나는 세상이면 담쟁이의 푸른 빛은 회복될 수 있을까.
새롭고 견고한 `벽'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어쩐지 사람들의 `말'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