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춘향과 이몽룡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판소리 춘향가는 작자미상의 작품이다. 목숨 건 춘향의 절개와 사랑이, 그리고 이몽룡의 입신양명과 신분을 초월한 성공 스토리가 구전으로 전해오면서도 감동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다.
그중 백미는 이몽룡의 어사출두 장면인데, 권력을 얻은 어사 이몽룡이 성춘향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해피엔딩일 것이다. 그 장면에 나오는 이몽룡의 한시(漢詩)는 절묘하다.
금준미주천인혈(樽美酒千人血) / 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肴萬姓膏)촉루락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落) /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
(호사스런 술독의 맛있는 술은 만백성의 피, 옥쟁반의 맛난 고기들은 만백성의 살점, 촛물 녹아내릴 때 백성들은 눈물 쏟고, 노랫소리 가득한 곳에는 백성들의 원망 소리 드높다.)
탐관오리의 패악을 경계하는 이 한시(漢詩)를 21세기인 `지금/여기'에서 다시 거론하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자유롭고 풍요롭다고 자처하는 이 시대에 `음식'을 놓고 차별하는 것을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로 대표되는 전제주의 시대의 탐관오리와 어찌 비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영환 충북도지사가 또 한번 전국 뉴스를 탔다. 이번에는 충북 연고 학생들의 관제 기숙사인 충북학사에서의 호화롭고 차별적인 식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학생들은 된장국과 단무지 등으로 구성된 카레밥을 먹고, 도지사와 국회의원 등은 전복내장 톳밥, 아롱사태 전골, 돼지갈비찜 장어튀김 등으로 호사롭게 차려진 식사를 한다는 것이 그저 `불편한 일'로 치부되는 세상은 위험하다.
2천7백원과 2만8천원,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식사는 어린 학생과 어른 정치인들을 구분하여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게 차별과 비하, 그리고 낯두꺼운 권력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두 집단은 불평등한 권위와, 성인이 되지 못한 미숙함으로 서로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생존과 욕망의 1순위인 `먹는 것'으로 미리 권위와 차별, 그리고 능력과 지배의 속성을 상기시키는 차원에서 식단을 따로 구성하는 교육적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차라리 믿고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춘향가'의 시대 배경처럼 반상(班常)의 구분이 엄격하고, 어른과 학생, 지도자와 아직 그렇지 못한 자, 경제적 능력과 지원의 위치와 수혜의 대상에 대한 신분의 차이를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는 일종의 교육 효과를 겨냥한 억지로 여기고 싶다.
뒤늦게 비난과 지탄이 생긴 후 김영환 충북도지사의 반응은 `불편할 수 있을 것'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불편함'이 지역사회에 점점 더 높은 `벽'을 갈수록 견고하게 쌓고 있는 중임을 도지사도 도민들도 도통 알려고 하지 않는다.
충북학사는 소위 `인-서울', 그것도 SKY를 비롯해 대체로 꿀릴 것 없는 명문대에 진학한 지역의 인재들을 지원하는 관제시설이다. 그러니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지역의 엘리트들에게 혜택이 한정된다.
그날 같은 곳에서 다른 식사를 한 학생들 가운데 미래의 지도자가 배출될 가능성은 보통의 다른 학생들보다 높을 것이다. 그중에는 이날의 차별이 언젠가는 자신들도 누려야할 권위 혹은 불평등과 차별의 높은(?)자리를 절치부심하는 자극이 될 수도 있겠다. 반면에 차별과 권력의 한끼 밥을 반면교사로 삼아 평등하고 차별 없는 세상의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의 길을 다짐하는 계기가 생길 수도 있겠다.
정치는, 올바른 지방자치를 위해 선거를 통해 주민이 권한을 위임받아 수행하는 선출직 국회의원과 단체장이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첫 번째 덕목은 상처를 주지 않는 일이다.
엘리트식 사고방식으로 차별과 구분을 당연히 여기며, 먹는 것조차 구별하는 일은 `그날/거기'에 있던 학생들에게 가해진 것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도민 모두에게 남긴 것이다.
외상(外傷)은 아물어도 마음의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충북'에, `고향'에 분노할 일이 많아지는 현실이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