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끔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게 뭘까?', `산다는 게 뭐지?'라는 의문을 갖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질문에 목을 매지 않는다. 그저 웃을 뿐이다. (笑而不答 心自閑) 나름 깊이도 있고 여유도 있는 대처법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 머리 싸매고 치열하게 달려드는 인간들이 있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들은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죄수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오는 일이다. 인간은 밝은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밖의 세상을 알지 못한 채, 어두운 동굴에서 쇠사슬에 묶여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만을 보고, 그것을 참된 세계로 착각하고 산다.
플라톤은 동굴 밖의 세계로 나갈 것을 요구한다. 동굴 안은 감각(육체)의 미망에 사로잡힌 세계이고 동굴 밖이 이데아의 세계(天上)이다. 우리가 이데아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건 이데아를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이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육체(감각)의 영향력을 최소화시켜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이성의 능력을 개발하면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태어났다는 건 동굴 안의 죄수처럼 살게 된다는 걸 의미하지만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는 능력(이성)을 구비하고 있어서 그걸 개발하면 인간의 곤궁한 처지를 벗어날 수 있다. 절망적이지만 자체적인 구원가능성을 갖고 있어서 플라톤의 인간은 희망적이다.
기독교는 인간 삶을 조금 더 절망스럽게 본다. 기독교에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죄인이다. 내가 왜 죄인이냐고? 아담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죄인이나 플라톤의 죄수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비슷한 것 같지만 훨씬 더 절망적이다. 죄인은 곤궁한 처지를 스스로 벗어 던질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신(예수)의 도움 없다면 인간은 절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기독교의 죄인은 스스로 구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구원 능력을 구비하고 있는 플라톤의 죄수보다 훨씬 곤궁하다.
그럼에도 인간 삶은 희망이 있다. 신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절대적으로 선한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은 원래 선하다. 다만 인간은 잘못 선택해서, 곧 선악과를 따먹어서 타락했을 뿐이다. 따라서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면 구원받을 수 있다. 곧 신(예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될 수 없는 죄인이지만 절대타자(신)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처지가 완전히 절망적이지는 않다.
부처가 보는 인간 삶은 훨씬 더 절망스럽다. 인간은 무지해서(밝지 못해서, 無明) 세상에 태어나고, 태어난 이상 반드시 죽는다. 영원히 살 것처럼 죽음을 망각하고 살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예외 없이 죽는다. 플라톤의 불멸하는 영혼? 그런 건 없다.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는 영생? 그런 것도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건 스스로의 구원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천상의 영혼이 아니다. 세세생생 유지되는 영혼? 그런 건 없다. 절대적으로 선한 신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만들어주고 죄인의 처지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신? 그런 건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으며 기대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절대자도 없다. 이런 점에서 부처가 보는 인간의 처지는 훨씬 절망적이다. 밝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고 하는 건 세상에 있게끔 하는 적극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안 태어날 수 있는데 암매(闇昧)하여 세상에 태어나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게 인간의 처지라는 것이다. 인간은 괜히 왔다 갈 뿐이다.
안 태어나게 되어 있는데 멍청해서 태어난 존재가 영위하는 삶? 그건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이 허깨비와 같은 삶은 신도 구제할 수 없다. 삶이라는 게 실재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허깨비임을 깨쳐야만 비로소 이 고통스러운 허상으로부터 벗어난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