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하고 차분한 김은숙 시인의 `갈참나무 숲으로 가자'라는 시를 만났습니다.
“나의 사랑은 늘 불온하였다
견뎌내거나 견뎌내지 못한 시간이
시월의 저녁 아래 낮게 엎드리고
갈참나무 매달린 저 작은 열매가
이 계절의 정수리에 아프도록 빛난다
굳어버린 생채기만 단단한 옹이로 키우며
어설픈 열매조차 맺지 못한 내 불온한 사랑은
저녁 갈참나무 숲에 와서 무릎을 꿇는다
그대여 나여 지나간 사랑이여
갈참나무 저 작은 도토리처럼
떫은 몸 스스로를 몇 번이고 씻어내며 지워
거친 밥상 따뜻하게 채우는 양식이 되거나
해거름 쓸쓸한 가지로 날아드는 새에게
푸근한 둥지 자리조차 내어주지 못한
척박한 묵정밭의 생애여
시월의 저녁 지금도
붉나무 잎새는 눈부시게 더욱 붉어지고
넉넉한 과즙의 사과 익어가며 수런거리는데
후줄근히 구겨진 내 사랑의 허물은
갈참나무 숲에 쌓인다”
몇 번이고 시를 읊조리다가, 조심스레 답가를 불렀습니다.
“사랑이 불온(不穩)했다고 말하는 때가 꼭 시월이 아니어도 괜찮다.
아직 만추(晩秋)로 정감이 깊은 십일월의 오늘처럼 꽉 차게 되는 시간과 계절이면 그만일 성싶다.
그때가 되면 갈참나무의 열매는 빛이 나고,
그 빛에 눈이 멀고, 정밀한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한 사랑은 홀로 남겨진다.
생채기를 옹이로 키운 까닭이다. 불온할 대로 불온해진 사랑의 기도처(祈禱處)는 갈참나무 숲이다.
무릎을 꿇으니 사랑하던 그대가 보이고, 사랑으로 떫은 몸이 된 내가 보이고, 지나간 사랑이 보인다.
갈참나무 숲에 허물이 쌓일 만큼, 사랑은 불온해도 괜찮다.
풀이 무성해진 거친 밭처럼 살아온 풍경이 보인다 하여도 끝난 것은 아니다.
붉나무는 워낙 붉어서 붉나무이고, 익어가는 사과는 모여 수런거리기 마련이다.
사랑이 불온했으므로 걱정하고, 몸살을 앓고, 왜 그러냐는 원망을 들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다시 꿈꿀 수 있다. 불온하므로 맞설 수 있기에.”
시인의 귀에 답가가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 답가의 형식과 주제와 감정과 이미지는 모자라도 좋습니다. 다만 시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으니까요.
갈참나무 숲에서 무릎을 꿇었던 시인이었기에, 한두 달 지나서는 `아름다운 소멸'이란 시를 노래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