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 앞에서 알맞은 광선을 기다리노라면 석공들의 정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1973년부터 우리나라 문화재를 전문으로 찍는 사진가 안장헌의 말이다. 1947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농업고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집에 취재하러 온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반했다.
아버지는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일제 목측카메라 서모카를 사주었다. 피사체와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핀트를 맞추는 카메라였지만 그는 뛸 듯이 기뻤고, 그때의 사진 찍는 방식에 익숙해 지금도 웬만한 거리의 피사체는 눈어림 짐작으로 사진의 선명도를 이루어낸다.
누가 곁에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진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학교공부는 바닥이었다. 다행히 당진중학교에 사진반이 있어 라이카 35mm 카메라와 암실이 있었다. 사진에 관심 있는 선생님 한 분이 있어 학교의 카메라와 암실시설을 자유롭게 사용하였고, 부족하나마 사진의 관심과 욕구를 채울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1965년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과 공부보다 사진에 관한 공부에 한층 열을 올렸다. 대학에 다니면서 스냅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을 때마다 카메라의 데이터를 기록하여 착실한 사진연구에 응용했다. 스스로 사진작업을 하는데 익숙했던 그는 암실작업을 위해 집 목욕실에 벽을 뚫고 나무판과 거울을 이용해 45도 방향의 책받침을 붙이고 빛이 들어오게 하여 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대학 도서관에 있는 사진 관련 책을 읽었고, 고등학교에서 일본어 독학 후 영어는 대학에서 키워나갔다. 그 덕분에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에서 만들어진 불교문화재 책을 보면서 사찰, 기와, 벽화와 불상 등의 지식을 착실히 쌓았다.
“불상이 일본은 권위적이고 위압감이 드는 반면 우리나라 것은 미소, 친절, 은근함이 있어 보면 볼수록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지요.”
신라, 백제의 장인 솜씨가 그만큼 뛰어나다고 말하는 그는 실제 중국 북의나라(청나라 직전의 나라)에서 배워 온 그 시대의 실력이 그대로 녹아 스며든 역사가 지금의 석굴암, 불국사, 무영탑, 석가탑, 다보탑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70년대가 지나고 80년대가 되면서 그의 사진작업은 본격적 성장기에 들어섰다. 이러한 집념은 또 자연과 어우러진 불교 문화재를 필름에 담아 열정으로 무르익어 갔다. 낙선재, 수원 화성, 능묘의 석물 등 그만의 사진은 온 정신을 집중해 탄생한 작품이다.
한국사진역사의 원로 중의 한 사람인 백오 이해선(조선왕족의 후손)에게 사진을 배운 인연으로 불교문화재 사진작업의 계기가 되었다.
“불상과의 교감이 책 10권, 20권 계속 읽으면서 나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로 다가왔어요.”
그 노력이 30~40㎏ 되는 카메라 장비를 지고 서너 시간씩 돌아다니면서도 전혀 지칠 줄 모르게 되었다. 그의 사진작업은 특히 경주, 공주, 부여에서 가장 많았다. 경주 중에서도 남산은 골짜기와 능선을 가리지 않고 들어선 상인들이 새긴 크고 작은 마애불상을 담았다.
풍광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찰과 함께 있는 문화재들을 각고의 노력으로 수백만 장 이상의 사진으로 이루어낸 그는 흡사 부처님의 얼굴을 닮은 모습 그대로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불현듯 살아있는 부처와 있는듯했으니까.
“아침 햇살이 빛날 때 돌부처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번져 나오고 있음을 보면 내 마음속의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의 말에 마음을 비워주는, 그리고 정신을 살찌우는 우리나라 불교 문화재에 깊은 뜻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