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청도에서 유학자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관조(觀照)스님. 그는 18세 때인 1960년 부산 범어사에서 불가에 귀의했다. 1978년 카메라를 구입, 20년 넘게 사진을 찍어온 그는 절과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던 사찰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전통적 주류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필름에 담았다.
“햇빛이 연하게 비치는 꽃 문 뒤에 서서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 빛의 환영을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환해집니다.”
그의 피사체는 사찰을 중심으로, 스님들의 생활, 불교유적과 흔적, 떨어진 낙엽과 뒹구는 꽃잎, 바위의 이끼 등에 관심을 두고 카메라 렌즈를 맞추었다. 사람들이 매일 보고 지나다니는 바위, 돌 같은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든 곳에 세계가 있고, 떨어진 꽃잎, 썩어가는 나뭇잎에도 아름다움이 있고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물의 실상과 참된 형상을 많이 찍었다.
그는 어렸을 적 경전을 공부하고 깨우친 것을 많은 사람에게 가르치고 행복과 즐거움의 방법을 알려주는데 사진이 제일임을 알았다고 한다. 부처님의 자비를 사진을 통해, 아름다움의 허망함과 변화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모든 사물에 불성이 있기에 사진으로 실상을 보여주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연구했다. 적정한 노출보다 빛을 약간 다운(약간 어둡게 함)시켜 바닥은 더 어둡고, 햇빛부분은 맑게 하여 같은 물체지만 신비롭게 나오게 했다. 특히 비 올 때 찍으면 생명체의 묘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부처님께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시고 다섯 제자를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신 후 `너희는 각자 흩어져서 많은 중생을 깨우치게 하라. 둘이 함께 가지 말고 각자 다른 길로 가라'고 하신 말씀을 항상 품속에 간직하고 다닌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깨우쳐야 하는데 중생들의 끈기가 모두 같지 않으므로 영상포교를 선택했다.
그는 승가의 생활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면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세계를 이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행사만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며 촬영하고 현상하는 일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는 동안 애로점도 많았다고 한다. 노스님들의 초상 사진을 찍는 것이 문제였다. 노스님들의 얼굴을 찍는 것은 이 시대 나한님을 그리는 것인데, 스님들은 카메라를 보면 무슨 큰 흉물을 보는 것처럼 거부하고 돌아서기 일쑤였다. 당시 해인사와 송광사가 총림(叢林)이고 방장(方丈)스님이 계시기에 해인사 방장스님을 촬영하고 송광사 방장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이 “사대오온이 본래 공(空)하여 실체가 없는 허상인데 그것을 사진으로 어떻게 찍을 것이며, 또 찍어서는 무엇하겠느냐”하시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차나 마셔라”고 하자 “말씀대로 진(眞)을 베끼지, 허상을 나타내지 않습니다”하면서 차 한잔 마시는 동안 간청한 결과 위의(威儀)를 갖추고, 불자(拂子)를 잡고 정좌하자 너무 감격해 물러났다고 한다. 이후 절에 들어온 이상 매일 듣고 외우고 읽고 하는 염불이나 경전 전부가 허상을 넘어 실상을 바로 보고 찾으라 한 것뿐이며 실상을 찍어야 한다는 것을 화두(話頭)로 삼았다.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은 현대판 어록을 편찬하는 것입니다.”그는 불교에서의 깨친 바를 글이나 문자로서가 아니라 사진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란다. 그는 사진을 선택한 것이 옳았다는 확신이 든다면서 “아무리 포교목적이었지만 남들이 일하고 수련할 때 옆에서 사진 찍는 일이 곱게 비칠 리 없었기에 남들보다 몇 배 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다”고 한마디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