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과거의 영광과 슬픔 모두 어제 내린 눈이고 이미 흘러간 강물이다. 미래(未來)는 아닐 미(未)와 올 래(來)의 합(合)이다. 아직 오지도 않은 것들이다. 혹여 누군가에게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런 날들이다. 내일이 먼저일지 다음 생이 먼저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철저히 살아가야 하고 열렬히 살아내야 하는 것은 오직 현재다. 불가(佛家)에서는 말한다.
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 (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전생을 알고자 하느냐 네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욕지내생사 금생작자시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
다음 생을 알고자 하느냐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구태여 전생까지 거슬러 갈 것도 없다. 현재는 과거의 자식이자 미래의 부모다. 현재는 과거의 채무 또는 채권에 대한 상속자다. 미래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는 오로지 현재에 달려있다.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도 잊기 힘든 과거의 고통도 분명 있다. 현재는 과거로부터의 파생이기에 완치되지 못한 과거의 고통은 현재로 전이되고 증식되어 악화 될 수도 있다. 방치하면 그로인해 미래는 물론 현재까지도 무너질 수 있다. 무너진 현재에서는 미래가 보이지도 보일 리도 없다. 여전히 과거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우울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손잡아 구제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현재의 자신뿐이다.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현재를 살아야 한다. 그 시작은 받아들임이다. 현재의 삶과 처한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포장 할 것도 합리화 할 것도 남 탓 할 것도 없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궁상맞으면 궁상맞은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현실 부정은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더욱 궁상맞게 만들 뿐이다. 현실을 절대 외면하지 말고 그 내면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강한 자존감의 시작은 현실직시에서부터다. 내려놓아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다 내려놓아라. 이번 생 허락되지 않은 욕심도 번뇌도 다 내려놓아라. 지난날 내려놓을 것 많던 필자는 절집을 찾았고 답도 찾았다. 스님들과 혹여 옷자락 끝이라도 스쳐 연(緣)이라도 깊어질까 아닌 온 듯이 아니 다녀간 듯이 절집 찾아 나서던 날들이었다. 불전 앞 두 손 모아 향 한 대 불 댕겨 사르고 공손히 이마 위로 올렸다 바치고는 몸 가지런히 바닥까지 숙였던 오체투지(五體投地). 할 수 만 있다면 하늘아래 제일 밑바닥까지 낮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심(下心)이었다. 행했던 절들이 내려놓음을 위한 유일한 방편이라 단언하지 않겠다. 그것이 그것들을 내려놓게 해주었다 말하지도 않겠다. 허나 그런 나날들이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기껏해야 백 몇 십 근인 몸뚱이 먼저 내려놓으니 천근만근 번뇌도 놓아지더라.
불안한가. 불안하다면 당신은 미래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날들의 시간들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모든 일들은 이미 일어난 일이거나 아니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거나 절대 일어나지도 않을 일 그것도 아니라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다. 불확실하니까 미래다. 쓸데없는 걱정들과 불안감으로 마음 졸이고 잠 못 이루는 밤에도 소주잔에 코 박고 주정하는 밤에도 현재는 흘러간다. 과거에 미래에 소중한 현재를 소비하지 마라.
향 한대 사르고 욕심 반 번뇌 반으로 무거운 몸뚱이 바닥에 숙였다가는 부처님 눈 마주치기도 송구하여 두 눈 감고 자세 고쳐 앉았다. 향내에 취했는지 향내에 깼는지 환청이 들린다.
`받아들임보다 내려놓음보다 늘 깨어있음이 먼저다' 하늘은 얌전했으나 바람은 얌전치 못했다. 유난히 풍경소리 소란하던 어느 해 겨울 순천 송광사. 거기에 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