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은 일반 대중에게 다윈의 진화론을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충분히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효과적으로 살아남는 유전자는 유지되거나 증가하고 그렇지 못한 유전자는 결국 사라지게 된다는 이론이다. 결국 진화의 핵심은 유전자인 셈이다.
나는 비슷한 생각을 무생물에 적용해 보기를 좋아한다. 우주 거의 전부는 무생물이다. 사실 생물도 무생물인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니 우주 전부가 무생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생물인 물질은 모두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우주가 처음부터 원자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빅뱅으로 우주가 창조되었지만 창조의 순간은 빛뿐이었고, 다음에 소립자들이 생겨나고 그다음에 수소와 헬륨 같은 가벼운 원소가 생겨나고, 그다음에 무거운 원소들이 태어났다.
빛은 물질이 아니니 질량도 없다. 그러니 그것을 존재한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소립자들은 질량을 가진 것들이니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니 우리가 일상 보는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 소립자들이 모여 핵과 전자로 이루어진 원자가 되면서 겨우 존재하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우주의 모든 것, 땅과 바다, 산과 들, 그리고 하늘의 모든 별들은 모두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아미노산과 같은 고분자 물질이, 무생물인지 생물인지 구별이 안 되는 바이러스가 되고, 이들이 다시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이 되고, 다시 아메바와 같은 원시 생명을 거쳐 지금의 인간이 탄생하기까지 장구한 세월을 거쳐 진화를 거듭해 왔다. 그 핵심 역할을 유전자가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빅뱅에서 무수한 별과 별로 이루어진 수많은 은하가 만들어지기까지 우주의 진화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원자이다. 원자가 탄생함으로써 비로소 우주에 존재라는 것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존재'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생각해 보자.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은 시공간 속에 그것이 지속적으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 순간 있다가 다음 순간 없어진다면 그것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 그 순간만은 존재했다고 하자. 하지만 그 존재가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그러한 존재를 존재한다고 우길 수는 있을지 몰라도 존재로 대접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대의 양자역학에 의하면 소립자가 홀로 있을 때는 그 소립자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냥 공간에 편재된 것이다. 그렇다면 소립자는 존재일지는 몰라도 존재로 대접받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소립자들이 여럿 모여서 한 덩어리가 되면 그것의 위치는 분명해지고, 덩어리가 크게 되면 아주 분명한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작은 돌멩이는 이리저리 굴러다니지만 큰 바위는 수천 년을 지킨다. 조약돌에 비해서 바위는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존재인가? 존재라고 다 같은 존재가 아니다.
소립자들은 원자가 됨으로써 비로소 존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원자가 존재이기는 해도 바위처럼 굳건한 존재는 아니다. 원자들이 모여서 분자가 되면 좀 더 확실한 존재가 된다. 화학반응이란 원자들 간의 이합집산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 화학반응을 통해서 새로운 분자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수많은 화학반응이 일어난다고 해도 원자는 없어지지도 새로 생기지도 않는다. 폭탄이 폭발하거나 석유가 타서 없어져도 그것을 이루고 있던 원자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생명의 진화가 유전자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라면 우주의 진화는 원자가 그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까?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면 원자는 더 이기적이다. 우주의 진화는 알고 보면 자기 존재를 더 존재스럽게하기 위한 이기적 원자의 농간이 아닐까? 생명의 진화가 이기적 유전자의 농간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