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지역 경영을 두고 벌인 고대 삼국 간의 쟁탈전
충주지역 경영을 두고 벌인 고대 삼국 간의 쟁탈전
  • 홍기택 충북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 주임연구원
  • 승인 2024.04.1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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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문화유산 이야기
홍기택 충북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 주임연구원
홍기택 충북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 주임연구원

 

충주는 남한강과 달천을 통해 경기 동부지역과 강원 영동 및 충북 내륙을 연결하는 중심지에 있는 지역이다. 그렇기에 과거 삼국시대에는 특히나 충주지역을 경영하는 국가가 곧 한반도 내에서 정치·경제적인 이점을 가져갈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충주지역을 경영했던 국가는 백제이다. 백제는 4세기 후반 남한강 수계망과 원주 지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5세기 충주 일대를 경영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백제는 충청 내륙을 영역화하고 동시에 충주 칠금동 유적과 같은 대규모 제철단지를 조성하여 국가 전반적인 철 생산량을 담당하고 국가의 핵심 시설로써 관리하였다. 이러한 모습들은 충주 탑평리 일대에 남아있는 탑평리 유적과 황새머리고분군, 인근의 장미산성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5세기 후반에는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남진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내륙을 이어주는 남한강과 달천 수계망을 가진 충주 역시 남진 전략에 있어서 주요 목적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원정군의 입장에서 전쟁물자를 현지에서 수급해야 하는 고구려군에게 있어서 풍부한 철 생산시설을 비롯한 자원들을 가지고 있던 충주지역 내 백제 세력은 주요 타겟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475년 고구려군이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웅진 일대로 퇴각하는 여세를 몰아 충주지역 역시 고구려의 수중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고구려는 기존에 백제가 운영하던 탑평리 일대를 그대로 운영의 중심지로 삼고 이곳을 국원성(國原城)으로 삼아 5세기 후반 남진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그 결과 백제 탑평리 유적의 상부에서 고구려의 구들 유구가 발견되는 한편, 탑평리 일대에 충주 고구려비가 세워졌고 충주 두정리와 단월동에서 각각 고구려 석실묘가 조영되었다.

이렇게 충주를 고구려의 군현제에 편입하고 전방 거점으로써 전쟁물자를 확보한 고구려 남진군은 5세기 말 충북 중부 · 동부지역 방면에서 적극적인 남진 전략을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가장 먼저 고구려군은 충북 서부 방면으로 진출하여 서울 방면에서 금강 수계권으로 직선으로 남하하던 서부전선 고구려군과 진천에서 합세하였다. 또한 달천 수계를 따라 충북 내륙 깊숙하게 진출한 고구려군은 백제의 후방을 공격하는 동시에 소백산맥 일대에서 북상하고 있던 신라를 적절하게 막아내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6세기에 접어들자 고구려의 남진은 추진력을 잃고 전선이 정체되었다. 6세기 중반에 이르면 고구려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하며 새로운 강자 신라의 북상으로 인해 충주를 기반으로 하는 고구려의 지배력은 상실하고 나아가 한강 지배권까지 신라에 내어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충주의 새로운 주인은 신라가 되었다. 신라 역시 충주를 북진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이곳으로부터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수급하였고 남한강 수계를 따라 북진하는 전략 요충지였던 것이다.

이에 신라도 충주에 수많은 유적을 조성하였다. 특히 중앙의 귀족들을 대거 사민 시키면서 충주지역의 빠른 영역화에 공을 들였고 이는 충주 일대에 분포해있는 루암리, 하구암리 고분군과 같은 대규모 분묘군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중요도가 높았던 충주는 신라에 의해 경영되면서 통일기에 접어들어 신라의 지방통치제인 5소경 중 하나인 중원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충주는 국토의 중심에 있는 충북 내륙의 주요 도시로 한반도 동-서와 남-북을 가르는 주요 도로들이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충주를 지나간다면 한 번쯤 고대에 이곳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관심을 가져도 좋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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