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젖제비꽃
흰젖제비꽃
  • 신찬인 수필가
  • 승인 2024.04.2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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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신찬인 수필가
신찬인 수필가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아파트에 영산홍 꽃이 만발했다. 곳곳에 빨강, 분홍, 하얀색 꽃이 지천이다. 화무십일홍이라고 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도 한철이다. 아침 일찍 꽃구경도 할 겸, 산책을 나갔다.

이리저리 살펴보다 영산홍 꽃무리 틈바구니에 난 작은 꽃에 눈이 꽂혔다. 흰색의 작고 가녀린 꽃잎이 붉은색 영산홍 사이를 비집고 나와 있었다.

다섯 개의 하얀 꽃잎, 꽃잎을 지탱하는 가느다란 줄기, 줄기를 감싸고 있는 몇 개의 잎 그게 전부였다. 무엇 하나 돋보일 게 없는 식물이다. `이게 무슨 꽃일까?' 핸드폰을 꺼내 다음에서 꽃 검색을 했다. `흰젖제비꽃'이란다. 맑고 청초한 꽃에 빠져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왜 그랬을까. 다수가 아닌 소수여서였을까. 크지 않고 작아서였을까. 화사하지 않고 청초해서였을까. 아니면 쉽게 눈에 띄지 않아서였을까.

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들과 베트남으로 여행을 갔다. 오랜만에 가는 해외여행이어서인지 출발하기 며칠 전부터 단체 카톡방이 부산하다. 상세한 일정과 현지 날씨를 올리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상의한다.

짐은 최대한 단출하게 쌌다. 옷 몇 가지, 세면도구와 화장품, 책 한 권 정도다. 나는 왠지 여행을 너무 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 편하게 지내려면 집에 있지, 굳이 돈 들여서 뭐하러 멀리까지 여행을 가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현지에 가서 불편을 겪기도 한다. 역시나 친구 중에서 내 트렁크가 제일 작았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친구들에게 물었다. “이 비행기 어디로 가는 거야, 나트랑이야, 달랏이야, 몇 시간 걸려.” 친구들은 어이없어하면서 그것도 모르고 여행하느냐고 핀잔을 준다. 자기들은 인터넷을 통해 여행지에 대해 자세히 검색해 보았다고 한다.

비행기는 5시간 넘게 걸려 나트랑 공항에 도착했고,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 가까이 짙은 어둠 속을 달려서 숙소인 호리존호텔에 도착했다. 침대에 눕자 창 너머에서 “쏴아”하는 굉음이 계속 들린다. 바람이 많이 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창가에 햇살이 비치는 것을 보고서야 잠에서 깼다. 그리고 커튼을 열면서 뜻밖의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평선 끝에서 해가 솟아오르고, 바닷물 위로 붉은 섬광이 일직선을 그으며 나를 향해 뻗쳐오고 있었다. 그 경이로움과 찬란함에 나는 숨을 멈추고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에 온몸의 말초신경이 곤두섰다. 호텔 바로 아래서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바닷가였다.

아는 선배가 산악회를 맡아 운영할 때다. 모임에서 여행을 할 때면 그 선배는 사전에 여행지에 가서 일일이 모든 것을 다 확인하고 온다. 식당에 가서 음식도 먹어 보고, 가야 할 장소에도 미리 다녀와서 여행지의 상황을 상세하게 공지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여행도 하기 전에 상상력은 뭉개지고, 그 선배의 안목에 갇혀버리기 일쑤였다. 물론 좋아하는 회원이 더 많았지만, 여행의 묘미는 늘 반감되곤 했다.

이 아파트에서 산 게 벌써 12년째다. 그러다 보니 어느 구석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안다. 산딸나무, 모감주나무, 개복숭아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언제쯤 꽃이 피고 열매는 어떤 빛깔인지 훤히 안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움은 있지만, 경이로움은 없다.

영산홍 틈에 핀 흰젖제비꽃을 보면서 나는 오늘 맛있는 음식보다는 새로운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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