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도 흔들린다
수평선도 흔들린다
  • 심억수 시인
  • 승인 2024.11.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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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이 지났다. 나뭇잎이 저마다의 색깔로 겨울 채비에 분주하다. 가을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에 길을 나섰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롭다.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자리 수평선이 보인다. 수평선은 나에게 꿈을 심어주던 동경의 대상이었다.

충청도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바다를 동경했다. 바다 앞에 서면 나의 꿈도 바다만큼 커지고 바다만큼 아름답게 이루어질 거라 생각도 했다.

꿈을 향해 희망을 그리던 젊은 날을 추억하며 경주 주상절리 파도 소리길에 도착했다. 주상절리 파도 소리 길은 읍천항과 하서항 사이로 1.7㎣의 아름다운 산책로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으면서 기둥 모양으로 굳은 형태다. 주상은 기둥과 같다는 의미이고 절리는 암석에 나타나는 쪼개짐 현상을 의미한다. 주상절리는 대부분 수직으로 발달하는데 경주 양남 지역은 수직과 수평의 절리를 동시에 형성하고 있다.

읍천항에 조성된 조망공원과 출렁다리를 지나자 전망대 아래쪽 바다에 부채꼴 주상절리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송이 해국이 바다 위에 곱게 핀 모습 같아서 동해의 꽃이라고도 한다.

내가 보기에는 여인이 벗어놓은 치마폭 같다. 바닷가에 주름치마를 벗어 두고 그 여인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치마를 펼쳐 놓고 천년의 세월 동안 자신의 흔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치마 주름 사이로 촤르륵 촤르륵 바닷물 드나드는 소리만 들려주고 있다.

주름치마 파도 소리를 뒤로하고 걷다 보니 마치 긴 장작을 세워둔 모습의 주상절리가 바다 위로 솟아 있다. 검푸른 바다는 주상절리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었는지 용트림한다.

바다는 거대한 파도로 일어나 하얀 거품을 토하며 수직의 주상절리를 껴안는다. 주상절리를 껴안는 바다처럼 나는 절절하게 세상을 부딪치지 못했다.

치열한 삶의 경쟁에도 반복되는 일상의 날이라는 생각으로 자족했다. 굴곡진 삶보다는 편안한 삶을 살고 싶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인생의 계절인 봄은 나에게 꿈을 주었고 여름은 나를 활기차게 했다. 가을은 세상을 더디게 사는 내게 행복을 주었다.

코끝에 매달리는 짭조름한 바람이 길을 재촉한다. 누워있는 주상절리가 보인다.

조금 전 보았던 세워 놓은 장작 모양의 주상절리를 바다 위에 차곡차곡 쌓아둔 모습 같다. 모든 시름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누워있는 주상절리에 거친 파도가 부질없이 달려든다.

동해의 푸른 바다와 해변의 아름다운 단풍을 보며 걸으니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상쾌하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해안선 따라 파도 소리길이 구부렁구부렁 아름답게 걸어오고 있다.

다시 바다를 바라본다. 달려오는 파도 넘어 저 멀리 수평선이 가물가물하다. 바다의 수평선을 동경하며 꿈과 희망을 붙들고 세월의 파도에 휩쓸려 여기까지 왔다.

거센 파도가 없다면 바다는 나에게 어떤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꿈을 향해 가는 초겨울 즈음의 나이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바람이 앞장서서 가을을 데리고 멀어지고 있다. 산천초목 어느 것 하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없다. 잔잔한 수평선도 흔들린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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