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6조와 3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에서 올라온 보고자료, 상소 등을 정리해 왕에게 올리고 왕의 지시를 각 부서에 전하는 역할을 했다. 승지들이 전공에 따라 6조의 연락책을 맡기도 했었으니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된다고 할 수있다.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는 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장인 셈이다.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다 보니 품계가 높은 정승과 6조 판서들도 눈치를 봤다. 도승지는 왕과 신료들 간 소통창구 역할도 했다. 견해 차이나 간쟁기구인 3사의 상소 등으로 왕과 신료집단이 대립할 경우 대개 왕의 입장을 대변했지만, 때에 따라 왕에게 고언을 하기도 했다.
도승지의 전범으로 세종 때 2년여간 이 직책을 맡았던 김돈(金墩)이라는 인물이 전해진다. 세종은 재위 기간 내내 형인 양녕대군의 비행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양녕은 상대를 가리지않는 여색과 각종 기행을 일삼다 부친인 태종에 의해 폐세자 돼 동생인 세종이 왕위를 물려받도록 한 인물이다. 동생이 즉위한 후에도 토색질을 멈추지 않아 신하들의 탄핵 상소가 빈번히 제기됐다. 세종은 형제간 우애를 저버릴 수 없다며 매번 상소를 기각했다. 그래도 상소가 끊이지 않자 세종은 천륜을 버리라는 부당한 탄원은 더 이상 받지않겠다며 승정원에도 형을 탄핵하는 상소는 돌려 보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일은 더 커졌다. 3사가 일제히 상소에 대한 왕의 답신이 없으면 물러서지 않겠다며 집단시위에 들어갔고, 군신간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승지들은 받은 상소를 왕에게 전하지도, 돌려보내지도 못하고 전전긍긍 했다. 보다못한 김돈이 직접 상소를 챙겨 왕을 대면했다. 그는 3사의 상소는 의무이다. 그들의 탄원을 읽지도 않는다면 언로를 막는다는 더 큰 비판을 받게된다고 왕을 설득해 사태를 수습했다. 김돈은 왕에게 인사에 너무 깊이 간섭하지 말라거나 신하들을 만날때 말을 줄이고 경청을 중시하라는 조언도 했다고 한다. 그가 죽자 세종은 장례비용과 함께 장문의 애도문을 내렸는데, 충언(忠言)으로 국사에 임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엊그제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회 국감장에서 진땀을 뺐다. 대통령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하고 대통령과 명태균의 통화 녹취가 공개돼 공천개입 의혹까지 불거진 상황이었지만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통화와 관련해선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상식적으로 아무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을 죽여서 당 대표를 살리자는 야권 정치 캠페인이라고도 했다. 대통령의 저조한 지지율에 대해서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사람으로서 너무 송구하다면서도 기시다 전 일본 총리도 계속 15%, 13% 내외였고 유럽에도 20%를 넘기는 정상들이 많지 않다고 토를 달았다.
정 실장은 새까만 후배 정치인과 거친 설전을 벌이다가 사과할 정도로 분투(?)했으나 등 돌린 민심을 달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대통령을 곁에서 보필하는 사람으로서 송구하다고 했지만 국민에 대한 송구함인지, 정치적법적상식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일로 고충을 겪는 대통령에 대한 송구함인지 모호했다. 애꿎은 유럽의 정상들을 소환한 것도 적절치 않다.
유럽에 이런 일로 지지율 하락을 겪는 국가 지도자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보수와 여권 전반을 절체절명 위기로 몰아넣은 사달의 근원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야당의 대통령 죽이기 프레임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민망했을 것이다. 돌을 던지면 맞고 가겠다는 대통령의 범어사 발언을 비서실장이 재확인시켰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이다.
정 실장은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까지 지낸 5선의 중진이다. 그 정치적 관록과 식견이 대통령의 현재만 방어하려는 단견에 갇힌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정치는 막히고 경제는 무너지는데다 안보 불안까지 겹쳐 전쟁을 걱정하는 국민까지 늘고있다. 바닥을 친 대통령 리더십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 상황이다. 대통령 부부가 직접 국민을 향하지 않고서는 민심 회복은 요원해 보인다. 정 실장이 왕명으로 금한 상소를 들고 왕을 독대해 상소에 답해야 한다고 간언함으로써 파국을 막은 도승지 김돈의 혜안을 빌렸으면 좋겠다.
충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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