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여년 필사본 보관 후 일제강점기 때 수탈 당해 방치
故 김지용 교수 1961년 교토대 서고 목록서 실체 확인
후대 한글학자 관심·연구 등 미흡 … 재조명 노력 필요
# 조선 첫 연구 신경준 `훈민정음운해'보다 35~49년 앞서
`경세훈민정음도설(이하 도설)'은 조선 숙종 때 명재상인 명곡(明谷) 최석정 선생(1646~1715)이 만년에 저술한 연구서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후 처음으로 훈민정음을 학구적, 음운학적으로 연구한 문헌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으로 인쇄되진 않았다.
선생의 `필사고본(筆寫稿本)' 영인본으로만 전해지는 이 저술은 국어학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훈민정음 창제이래 나온 최초의 한글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어학사에서는 훈민정음 해례(1446년)후 305년만인 1750년 나온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를 최초의 한글 연구로 꼽고 있다.
하지만 선생의 도설은 이보다 35년에서 49년이 앞선다.
이 책을 처음 발견한 고(故) 김지용 전 청주대 국문학과 교수(1922년~2013년)는 최석정 선생이 이 책을 저작한 시기를 1701년에서 선생이 작고한 1715년 사이로 추정했다.
그 근거는 최석정 선생의 연보에서 찾을 수 있다.
선생은 숙종 때 영의정을 8번이나 지냈지만 정치적으로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학문적으로 주자성리학외에 비주류인 양명학에 경도된 데다 경세적 학풍을 보이다 보니, 당대 주류 세력인 노론의 집중적인 견제와 공격을 받은 탓이다.
선생은 숙종 36년인 1710년 영의정과 내의원 도제조를 겸직하다 숙종의 병환에 시약을 잘못한 책임으로 삭직돼 고향 진천 초평에 기거한다.
이후 70세인 1715년 서거해 지금의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야산에 묻혔다.
고 김 교수는 선생이 파직돼 고향에 기거하던 이 시기를 도설 저작 시기로 추정한다.
이 추정에 아직 반증이나 반론이 없으니 이 책이 최초의 한글 연구서임이 분명하다.
김지용 교수는 이 책을 해제하면서 현대 디지털시대에 가장 적합하고 우수한 문자로 평가받는 한글에 대해 이미 300년 훨씬 이전, 선생이 입증하고 있음에 학술적 가치를 부여했다.
최석정 선생은 도설에서 훈민정음 28자를 초성과 중성, 종성, 소리의 높낮이(音高低), 발음모양(開閉)으로 나눠 모두 1만2288자로 조합됨을 밝혀냈다.
여기다 `ㅈ', `ㅊ'과 순경음(`ㅱ, ㅸ, ㅹ, ㆄ')을 합치면 그 수효가 더 늘어(α)난다고 기술하고 있다.
국어학자인 고 김석득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1931~2023)는 지난 2009년 우리말 연구사에 게재한 `경세훈민정음도설-국어학 상의 의미' 논문에서 이렇게 평했다.
“훈민정음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서 경세훈민정음도설을 주목해야 한다. 최석정 도설의 확실한 저작 연대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보다 35년 내지 49년이나 앞섰기 때문이다.”
조선 고증학자인 홍양호(1724~1802)도 그의 저술 `이계집(耳溪集)에서 “뛰어난 문신 최석정같은 학자가 있어서 훈민정음의 깊은 뜻과 이치를 연구 발휘했으니, 뛰어나고 훌륭함이여! 대단하구나!”라며 선생의 저술을 극찬했다.
한글학회 김슬옹 이사(62·한글학자)는 “훈민정음 창제이후 훈민정음에 대해 학문적으로 체계있게 연구된 최초의 훈민정음 연구서로 학술적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 일본 교토대학 서고에 `벌레 집'으로 방치 … 1961년 실체 확인
조선 영·정조 때 이조판서였던 이계(耳溪) 홍양호(1724~1802)는 자신의 저술인 `이계집(耳溪集)' 10권 `경세정운도설서'에서 최석정 선생의 도설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세종 장헌대왕께서 천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알으시고 28자를 창제하시고 이를 더 늘리어 펴 놓으면 세상 천하의 글을 모두 표현할 수 있어 어린이나 부녀들도 익히기 쉬우니 서계문자를 만든 태호 황제와 더불어 공적이 큼이로다. 그러다 뛰어난 문신 최석정같은 학자가 있어 훈민정음의 뜻과 이치를 연구 발휘하니 그 공이 훌륭하고 대단하구나!”
대단한 상찬이다. 그러나 홍양호의 이런 기록에도 경세훈민정음도설은 후대에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해 왔다.
저술이 책으로 인쇄되지 않은 채 강화도 전등사 마니산 고분에 필사본으로 200여 년간 보관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인 1910년 조선총독부에 와있던 가아이고오민(河合弘民)이 헌병의 힘을 빌어 전등사에 보관된 2160권의 서적과 함께 수탈해 가면서 역사 속에 묻혔다.
이후 이 책은 반세기 넘게 교토대학 서고(河合文庫)에서 수장돼 `진토'처럼 변해가고 있다.
고 이숭녕 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1904~1994)는 홍양호의 이계집을 통해 최석정의 저서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 본서를 볼 수 없어 유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다행히 이 저술은 지난 1961년 김지용 청주대 국문과 교수(2013년 작고)에 의해 300년이 지난 뒤에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교토대학 서고 도서 목록을 조사하던 중 경세훈민정음도설 등 희귀 문헌들을 마이크로 필름에 담아온 고(故) 김 교수는 “필자가 촬영하고 난 다음엔 폴 싹 무너져서 전모를 알아보기 여렵게 됐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오랜 세월 훼손돼 벌레 집이 들고 지질마저 사그라든 것이다.
이렇게 발견된 최석정 도설은 1962년 동아일보의 “경세훈민정음도설 책을 찾았다”는 기사로 국내에 알려졌다.
1973년엔 고 김석득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2023년 작고)가 동방학지에 `최석정의 경세훈민정음도설-국어학상의 의미'란 제하의 논문을 싣기도 했다.
고 김석득 교수는 충북 괴산 출신이다. 충북이 낳은 최석정 선생의 저술이 충북 연고의 두 교수(고 김지용·김석득 교수)에 의해 재조명되니 역사의 인연인가 필연인가.
하지만 선생의 경세훈민정음도설에 대한 관심은 아직도 미흡한 게 현실이다.
김지용 교수는 “필사본이 유일해 학자들의 눈에 잘 띄지 못했던데다 국내 학자들의 관심과 연구 노력이 부족했다”고 후대의 무관심을 자책했다.
한글학회 김슬옹 이사도 “원본이 국내에 존재하지 않은 데다 훈민정음의 음운적 연구가 한문으로 이뤄지다 보니 학술적 가치에 비해 후대 한글학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많이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조선 최고 융합인재 ‘최석정을 다시 보자'
을병대기근 때 청에 구휼미 5만석 주청 … 백성 구한 영웅
세계 첫 마방진 창안도 … 역사 바로 세우기 공론화 제안
# 충북이 낳은 조선 명재상
명곡 최석정 선생은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8번이나 지낸 명재상이다. 충북 진천 출신으로 현재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1리 야산에 묻혀있다.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로 알려진 최명길 선생의 손자로 그가 창안한 9차직교라틴방진은 세계 최초의 마방진으로 기록돼 있다.
정치가인자 관료이지만 조선사회 주류인 주자성리학에만 매몰되지도 않고 양명학과 수학, 과학, 음운학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둔 조선 최고의 `융합인재'였다.
17세기 지구를 덮친 소빙하기에 조선 백성 577만명 중 141만명이 굶어 죽은 `을병대기근' 당시, 청나라 구휼미 5만석을 들여와 아사로부터 백성들을 구한 영웅이기도 하다.
그의 저술에는 백성들을 향한 실사구시, 경세(經世)학적 학풍이 곳곳에 배어있다.
경세란 나라를 윤택하게 운영해 백성을 구한다는 사상이다. 경세제민이다. 최초의 한글 연구서인 `경세훈민정음도설'이 `경세'로 명명된 이유다.
창간 19주년 특집기획으로 명곡 최석정 선생을 재조명한 충청타임즈는 한글날 특별기획을 통해 `최석정 선생 역사 세우기'에 대한 공론화를 지역사회에 거듭 제안한다.
/오영근 대표이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