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만세 외친 충청권 종교인 누구?
독립만세 외친 충청권 종교인 누구?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7.02.23 1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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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 서명 민족대표 종교인 33명

충청권 천도교 손병희·개신교 신석구 등 7명

1919년 3.1운동때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33인이다. 종교별로 보면 천도교 15인,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이다. 충청권 종교인은 손병희 등 7명이다. 제98주년 3.1절을 앞두고 민족대표에 참여한 지역 출신을 통해 역사적 발자취를 돌아봤다. 

 # 충북

△손병희(청원·1861.4.8~1922.5.19·천도교)=“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이 말은 손병희 선생이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다짐한 말이다. 동학 제2세 교조 최시형 밑에서 종교적 수양을 닦았고,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를 지냈다. 선생은 독립선언식 이후 체포돼 2년여 옥고를 치렀다.

△권병덕(청주시·1868.4.25~19 44. 9.15·천도교)=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 때 손병희와 함께 6만여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했다. 1908년 천도교에 입교, 전제관장 등을 역임했다.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 등 천도교의 주요 직임을 역임했다.

△신석구(청원 미원면 금관리·1875.5.3~1950.10. 10·개신교)=20대 후반이던 1907년 개신교에 입문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경기도와 강원도 등 여러 곳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191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오화영의 권유를 받고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했다가,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신홍식(청주시·1872~1937·개신교)=1906년 세례를 받은 뒤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3·1 운동에는 이승훈의 권유를 받고 북감리교의 대표로 참가했는데, 준비 단계에서 미리 경성부에 올라와 박희도 등 북감리교 인사들을 이승훈에게 소개하고 평양지역의 만세 운동도 조직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정춘수(청원·1875.2.11~1951.10.27·개신교)=함경남도 원산에서 선교사를 통해 세례를 받고 감리교에 입교한 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목사가 됐다. 1919년 2월 경성부에서 오화영, 박희도의 권유를 받고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자로 참가했지만 관련자들이 체포된 뒤 자수해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서울에서 목회하던 중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전향서를 발표한 뒤부터는 친일 활동에 나서면서 친일인사에 포함됐고, 청주 3·1 공원에 설치된 동상이 철거됐다.
 
# 충남

△이종일(태안·1858.12.1 0~192 5. 8.31·천도교)=3·1 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3만5000부의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다. 1882년 일본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다녀온 뒤 개화 운동에 투신해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서 활동했다. 1906년 손병희의 권고로 천도교에 입도한 뒤에는 천도교 포교활동 외에 3·1 운동에도 가담했다. 3·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국문학자로 활동했다.

△한용운(홍성·1879. 8. 29~1944. 6. 29·불교)=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했다. 1944년 6월 29일 중풍과 영양실조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했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했다.

/김금란기자
silk8015@c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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