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 정현수<칼럼니스트>
  • 승인 2017.02.1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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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정현수<칼럼니스트>

초등학교 3학년 때 테리우스처럼 얼굴이 하얗고 곱슬머리인 녀석이 있었다. 영문 이름 이니셜은 DS. 눈곱만 간신히 떼고 걸어서 등교하던 나와 달리 녀석은 그 귀하던 자전거를 따르릉거리며 아침마다 바람을 갈랐다. 내가 녀석을 고깝게 생각했던 건 선생님의 귀여움과 여자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해서가 아니라 반장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녀석의 외모야 내 눈엔 그저 빤질거리는 고양이 같았고 성적도 충분히 앞지를 수 있었지만 반장이라는 완장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학교 건물 외벽에 어떤 여선생님을 모욕하는 낙서가 등장했다.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했던 우리 반 모두는 유력한 용의자들이었다. 담임이 반 전체를 책상 위에 무릎을 꿇렸고 손도 들게 했다. 시간이 흐르자 여자 아이들 입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팔이 내려가면 여지없이 회초리가 날아들었고 접힌 무릎은 감각이 희미해졌다. 담임은 선처를 약속하며 자수를 권유했지만 범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화가 끝까지 치민 담임이 한 사람씩 차례로 몽둥이질을 하려고 할 때였다.

“제가 그랬습니다.”

목소리는 DS의 것이었다. 담임은 설마 하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사실 여부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우리 모두는 DS가 진짜 범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육체적 고통 앞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DS는 교무실로 불려갔고 우리 모두는 책상에서 내려왔다. 뻐근하다 못해 감각이 없어진 팔다리는 서서히 풀어졌지만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제가 그랬습니다.”처럼 멋진 대사는 왜 DS에게만 떠올랐을까 하는 애석함이 뒷맛을 씁쓸하게 했다. 어떤 집단의 대표로서의 역할과 책임질 위치에 있는 사람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지 그때 어렴풋이 정리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지 두 달여 지난 지금, 나라 밖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 사드 배치 결정을 이유로 중국이 경제 보복을 강화해 수출 기업 중 26퍼센트가 피해를 당했고 소프라노 조수미 씨의 공연도 이유 없이 취소되었다. 일본은 부산 소녀상 설치에 반발해 주한 일본 대사를 일시 귀국시켰고 최근엔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억지를 부려 한일관계는 다시 대치 국면에 접어들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 기조 강화로 한미 FTA 재협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주한미군의 방위비 분담 조정도 큰 부담이다.

나라 안 상황도 이에 못지않다. 2016년 말 청년 실업률은 9.8%로 통계가 작성된 이래 가장 높아 실제 실업자는 45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경기 침체로 영세 자영업자들은 연이어 문을 닫고 일가족 동반자살의 비극이 하루가 멀다 하고 기사화 된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박근혜 정부의 책상 위에 올라앉은 국민들. 그들의 팔이 저려오고 접힌 다리는 감각이 없어지는데, 그래서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위협받고 있는데 아무도 미안해하거나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반장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어서, 또 그럴 만한 권한이나 책임이 없어서 “제가 그랬습니다.”를 외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나 사실 판단에는 정확하고 엄격해서 “쟤가 그랬습니다.”를 소신 있게 말하는 그들. 천만이 넘는 촛불이 몇 달 동안 타오르며 쟤가 그랬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나는 하지 않았다고 부정만 하는 이들에게 국가와 국민은 어떤 의미일까. 유년시절 “제가 그랬습니다.”의 기회를 놓친 나는 “쟤가 그랬습니다.”를 외치러 다시 광장에 나갈 것이다. 서늘해서 촛불 들기에 좋았던 지난 가을에 DS도 나처럼 광장에 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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