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기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 정현수<칼럼니스트>
  • 승인 2016.08.1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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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정현수<칼럼니스트>

동강이 굽어 보이는 산골에서 태어난 때문일까. 나는 가벼이 산을 오르고 어라연처럼 순한 강에서 헤엄친다. 개구리 울음소리 가득한 밤이면 달빛에 의지해 달리는 것도 좋아한다. 자연친화적인 이 취미들의 공통점은 혼자서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이므로 경쟁이나 동행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간혹 경쟁에 나서더라도 극복할 상대는 오직 나뿐이며 누구도 곤경에 빠뜨리지 않는다. 올림픽의 어떤 종목처럼 온갖 기술을 동원해 상대를 제압할 필요가 없다. 상대는 속이되 나는 속지 않아야 하는 수 싸움과도 거리가 멀다.

12시간의 시차 때문인지 올림픽 열기가 예전 같지 않다. 지난 런던 올림픽보다 시청률이 저조하다고 한다. 그래도 뉴스 첫머리와 대낮 TV프로를 차지하는 건 올림픽 소식이다. 기술의 진보로 TV 화면은 한층 화려해지고 요란해졌지만 볼만한 경기가 없다. 중계방송이 이른바 효자 종목에만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여자 역도에서 동메달을 딴 윤진희 선수의 경기는 생중계하지 않았다. 우리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그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는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 동메달은 결코 승리가 아니다.

땀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올림픽 메달은 노력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선수는 은메달을 따고도 죄송하다며 울먹였다. 선수의 노력과 메달 색깔이 정직하게 상응한다면 이 선수는 은메달만큼 노력한 것이므로 결코 죄송할 일이 아니다. 노력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아서 선수들은 자꾸 죄송해한다. 삶 전체가 경쟁의 연속인 숨 막히는 사회에서 또 하나의 공개경쟁을 관람하며 씁쓸히 대국민 사과를 받는다. 남의 경쟁이라서 우리는 치 맥을 시켜 놓고 은메달의 사과와 눈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느긋해하는가.

파리에 머물고 있는 영화감독 김상수 씨는 나와 페이스 북 친구다. 프랑스에서는 올림픽 소식을 자주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처럼 올림픽 중계가 요란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메달 순위가 궁금하면 그는 한국 뉴스를 찾는다. 프랑스에서 올림픽은 여러 지구촌 소식에 하나일 뿐 요란하게 더 중요하지는 않다. 어린 운동선수들에게 공포(공부 포기)분위기를 조성하지도 않는다. 변호사, 회계사, 경찰관 등 프랑스 선수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이들에게 올림픽은 상대 선수를 반드시 꺾어야 하는 경쟁의 장이 아니다.

같은 기간 성주 군민들은 폭염 속에서 사드배치 반대 투쟁을 이어갔지만 언론은 이를 전하지 않았다. 비리 백화점으로 불리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사퇴 여부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진경준 등의 비리 검사들 얘기도 그렇다. 사회를 감시하고 비판하던 「PD수첩」등의 시사프로그램은 일제히 결방됐다. 이러니 올림픽이 현대판 콜로세움이며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란 소리를 듣는 것이다. 국가 간 공개경쟁을 일으켜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바보로 만들었던 독재자들의 우민화 정책이 재현되는 느낌이다.

경쟁을 부추기는 국가주의는 비판 없이 승패를 정당화한다. 정당하든 부당하든 나는 이 경쟁이 싫다. 지는 게 유쾌하진 않지만 누굴 이기고 싶지도 않다. 삶의 방향과 속도를 승패로만 견주려는 단순함과 야만성에 염증을 느낀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고 했던 마라토너 에밀 자토벡. 이기려는 달리기가 아니었기에 그의 사유는 아직도 신선하다. 경쟁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이들과 산을 오르고 강을 헤엄치고 들판을 달리고 싶다. 이기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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